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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좋은 땅에 뿌려진 하느님 신앙 - 천주실의(天主實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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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6

[신앙 유산] 좋은 땅에 뿌려진 하느님 신앙 : 천주실의

 

 

머리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하느님, 독생 성자(외아들)를 세상에 보내어 연류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가톨릭 신앙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배달 겨레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뚜렷하게 인식된 때는 천주교 신앙이 수용된 2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우리 겨레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하느님을 여러 신(神)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最高神)으로 받들어 왔다. 이 전통적 하느님관(神觀)은 오늘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삼위 일체적 유일신관과는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밝혀 주기 시작했던 하느님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인생관 · 세계관의 전환을 가능케 해주었다. 위계적(位階的) 질서를 전제로 한 전통적 하느님관을 극복하고, 현세의 위계적 질서를 초월한 새로운 하느님관을 갖게 됨에 따라 그들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겨레에게 새로운 하느님관을 가져다 준 것은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되었던 여러 가지 천주교 서적이었다. 그중에서도 마테오 리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는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하느님관을 가져다 준 대표적 책이다. 이 책은 전래된 지 얼마 아니 가서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민인(民人)들도 이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누구인가

 

동양과 서양이 본격적인 만남을 이룩한 때는 ‘지리상의 발견’이 진행된 16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6세기 후반기 중국의 해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서양의 선박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중국에 전해 주었다. 이 두 가지의 새로운 것을 전파해 주는 데 이바지한 대표적 인물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 1610년)이다.

 

리치는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마체라타(Mecerata)에서 태어났다. 그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향리의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받았고, 로마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했다. 이곳에서 그는 예수회에 입회했고, 1580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1583년 중국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중국의 지식인 및 관료들과 교류하면서 천주교의 사상과 서양의 문명을 전하기에 힘을 다했다. 그는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세상을 떠나 중국의 부드러운 흙 속에 누워서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중국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때를 전후한 사기였다.

 

리치는 로마 대학에서 당시로서는 최고의 과학 교육을 받은 ‘과학자’ 수준의 선교사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은사이며 당시 유럽의 대표적 수학자요 천문학자인 클라비우스(C. Clavius, 1537~ 1612년)가 주석한 유클리드의 “기하 원본”(幾何原本) 등을 한문으로 번역 간행했다. 그리고 그의 천문 · 지리 사상은 우리 나라에도 전파되었다.

 

한편, 리치는 중국의 정통 사상인 유학에 폭넓은 지식을 가짐으로써 중국의 지성과 상당한 정도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이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준다는 보유론(補儒論)의 논리를 존중하며 천주교 신앙을 중국에 전파하고자 했다. 그의 문화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은 중국 및 유교 문명권에서 신앙을 전파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보유론적 신학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 바로 “천주실의”이다.

 

 

“천주실의”는 어떤 책인가

 

마테오 리치는 전통적 문명국인 중국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자 했다. 그가 본 16세기 말엽의 중국은 물질 문명이나 정신 문화의 두 측면에서 유럽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중국 문화는 유럽 문화에 의해 보강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천문학이나 지리학 등 일부 분야는 중국의 그것보다 우월하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리치는 중국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조화를 생각하며 “천주실의”를 저술하게 되었다.

 

“천주실의”(De Deo Verax Disputatio)는 1593년부터 1596년 사이에 저술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책은 1603년 북경에서 처음으로 간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천주실의”는 상하 2권, 8편 174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인 학자와 서양인 학자가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대화체 문장으로 서술되었다. 중국인 학자를 통해서는 중국의 신유학(新儒學) 및 불교와 도교에 관하여 논하게 하고, 서양인 학자를 통해서는 중국의 선진(先秦) 시대 원시 유학(原始儒學)에 기초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해설하는 호교론을 전개하고 있다.

 

“천주실의”에서는 먼저 천주님의 존재와 그 속성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리치는 천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인격적 존재로 밝혀 준다. 또한 천당 지옥과 영혼 불멸 그리고 상선 벌악(賞善罰惡)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중국의 범신론(汎神論)을 비판하고,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하며 천주교의 가르침이 옳고 바름을 말하고 있다.

 

이에 이어서 이 책에서는 천주성(天主性)과 인간성(人間性)을 설명한 다음,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 의지(自由意志)의 목적이 천주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밝혀 주었다. 끝으로 이 책에서는 사제 독신제와 원죄 및 천주 강생(降生)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새로운 천주관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을 갖도록 제시해 주며, 인간의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밝히며 새로운 사회 규범의 실천을 강조하고자 했다.

 

 

새 하느님 새 사람

 

“천주실의”는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나라에 널리 전파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유몽인(柳夢寅, 1559~1623년)이 이를 언급한 바 있고, 또한 1614년에 간행된 이수광(李?光, 1563~1628년)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수록되어 있다.

 

“천주실의”는 17~18세기 우리 나라의 지성계에서 널리 읽힌 책이 되었다. 이를 읽은 일부 인사들은 “천주실의”의 내용에 관한 비판을 구체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또 다른 지식인들은 천주교 신앙의 특성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신앙 운동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천주실의”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에 이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천주실의”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들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갖도록 해주었다.

 

즉, “천주실의”에서는 하느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만사(萬事)의 주재자이심을 말해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 선조들은 천주님이 세상의 임금보다 더 높은 분이며, 세상의 부모보다 더 중요한 분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존중되던 충효(忠孝)의 규범에 따라 천주님을 대군 대부(大君大父)로 받들었다. 충신과 효자가 부모와 임금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할 수 있듯이, 우리의 선조들은 대군 대부이신 천주님께 충성과 효성을 바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순교자가 되기까지 했다.

 

또한 창조주 천주, 주재자 천주께 대한 인식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해주었다. “천주실의”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고귀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다울 수 있음은 천주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존재임을 말했다. 여기에서 우리 선조들은 피조(被造)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발견하여 이를 설천하게 되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천주실의”는 18세기 조선이라는 ‘좋은 땅’(마르 4,20 참조)에 뿌려진 하느님 신앙의 씨앗이었다. 그 씨앗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그리고 그 이상의 열매를 내었다.

 

 

맺음말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 1873~ 1930년)와 호적(胡適, 1891~1962년)은 마테오 리치를 중국 근대 학술사에서 가장 뚜렷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그는 중국 문화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의 업적은 중국 역사와 중국 교회사의 일부를 이루었다.

 

마테오 리치는 우리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리치가 전파한 세계 지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우리의 선조들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리고 그가 “천주실의”를 통해 밝혀 준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신앙 선조들에게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관을 갖도록 해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78년 정조(正祖) 임금은 리치의 과학적 업적에 감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780년 북경을 방문한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도 리치의 묘소를 찾아 그를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1784년 우리 교회가 창설된 이후 신앙에 대한 리치의 가르침은 우리를 변모시키는 큰 힘으로 작용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천주실의”는 바로 우리 교회의 책이며 우리 자신의 책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2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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