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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대원군 부인의 영세 입교 - 왕의 어머니의 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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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9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대원군 부인의 영세 입교

 

왕의 어머니의 영세

 

 

조선의 임금 철종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죽었다. 왕실에서는 철종의 후계자로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영입하여 왕으로 세웠다. 이 임금이 곧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었다. 고종이 즉위한 뒤, 왕을 낳은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왕의 어머니이며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민씨는 그의 본관을 따서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으로 불렀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한 뒤 1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바로 1866년에 천주교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 박해과정에서 조선에 들어와 선교하던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가운데 9명이 순교했고, 수천 명의 교우들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 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어머니 부대부인 민씨(1818-1898년)는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대원군 부인과 천주교의 인연

 

이하응이 재야에 있던 시절, 그의 안해 민씨 부인은 고종을 낳은 뒤 박씨 부인을 유모로 두었다. 박씨 부인은 세례명이 마르타였고, 민씨 부인에게 천주교를 전해준 바 있었다. 칼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대원군의 부인, 곧 임금의 어머니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문답을 조금 배웠으며, 날마다 몇 가지 기도문을 외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미사를 드려달라고 내게 청했다.” 물론 이때 부대부인 민씨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1866년 박해가 시작되자 민씨 부인의 천주교 학습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그와 천주교를 연결해 주던 박 마르타도 박해가 일어나자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1868년 2월에 순교하였다. 박해 이후 조선의 정세는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얼마 아니 가서 대원군은 실각했다. 조선은 대원군 시대의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일본과 서양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했다. 이로써 대원군의 실각은 더욱 확실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은 조선 정치의 표면에 강력한 세력가로 다시 등장했다.

 

이때 이후 부대부인 민씨에게는 천주교와 접촉을 재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와 인편으로 연락했다. 그가 살고 있었던 운현궁에는 이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천주교 신자 궁녀들이 있었다. 그는 이 인편을 활용하여 1894년 이후 1895년 말 사이에만도 모두 13차례에 걸쳐 뮈텔 주교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접촉하고 있었다. 또한 1895년에는 서울에 진출해 있던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의 프랑스인 수녀들이 그를 방문한 바 있었다.

 

 

민 부대부인의 영세

 

이러는 동안 부대부인 민씨는 천주교에 대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입교할 마음을 굳히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뮈텔 주교에게 세례 받기를 청했다. 당시의 상황을 뮈텔 주교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96년 10월 11일 왕의 어머니가 세례를 청해왔다. 그는 지난 봄부터 집안 살림을 며느리들에게 넘겼고, 그래서 미신행위를 피할 수 있었다. 합의한 대로 나는 저녁 7시에 조 회장과 함께 출발, 대원군의 궁궐하녀인 이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은 바로 궁궐 근처에 있었다. 15분이 지나자 왕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비밀리에 그곳에 당도했다. 가마꾼들은 그것이 한 궁녀에 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전부터 아는 최씨라는 한 궁녀만이 부대부인을 수행했다.

 

그는 매우 검소한 차림으로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아주 간략히 인사했다. 시력은 약하나 청각은 매우 예민하고, 또 79세의 고령임에도 부인은 모든 신체 기능이 자유롭다. 부인은 나에게 밖에 희망을 둘 곳이 없다고 하며, 그의 가정과 모든 일가를 부탁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첫째요 유일한 의탁처는 오직 천주님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충고를 아주 잘 이해했고, 내게 영세를 청했다. 고령이고 성령의 도움도 특별히 필요하고 또 궁궐에서 나오기 어려운 사정 등을 고려해서 나는 그에게 견진성사까지 받도록 권했다. 그는 이 권고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나는 아주 조그마한 방에서 가능한 한 장엄하게 완전한 성인 세례예절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수산나가 그의 세례대모가 되었고, 2명의 이 마리아 중 연장자가 견진대모가 되었다. 예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자리를 떴고, 이어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9시였다.”

 

이날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교회의 품안에서 민 마리아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세례대모 원 수산나는 고종의 유모로서 1868년에 순교한 박 마르타의 딸이었다. 추측컨대, 원 수산나는 부대부인을 천주교와 다시 연결해 준 인물인 듯하다. 부인이 세례 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비밀에 붙여졌다. 영세를 받은 지 며칠 뒤 민 마리아는 왕가에서의 생활상 대재와 소재를 지킬 수 없다고 하며 뮈텔 주교에게 관면을 청해왔다. 이처럼 민 마리아는 일상생활에서도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1897년 9월 5일에 그는 뮈텔 주교에게 영성체와 고해성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1898년 1월 8일 밤 10시에 부대부인 민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뮈텔은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병자성사와 임종을 지키러 운현궁에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민 마리아가 사망한 뒤 그의 입교 사실은 고종에게 전해졌고, 대원군도 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뮈텔의 표현대로 “하늘에 많은 빚을 진” 대원군도 민 마리아가 죽은 지 석 달 뒤 이승을 하직했다. 이들 부부의 장엄한 장례식이 그해 5월 유교의례로 거행되었다.

 

 

남은 말

 

한국교회사상 가장 혹심한 박해를 일으켰던 인물은 대원군이었다. 그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에 대해 뮈텔 주교는 내심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으며, 민 마리아가 죽은 뒤 이 사실을 동료 선교사나 서양인들에게 알렸다. 아마도 뮈텔 주교는 민 마리아의 세례를, 교회가 박해를 이기고 ‘승리한’ 증거의 하나로 생각한 듯하다. 서울 종현의 언덕 위에는 신앙이 승리한 증거물로 명동성당이 제 모습을 우뚝 드러내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나라의 주인이 왕실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당시 왕실에 속한 여인인 민 마리아의 세례는 교회의 승리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승리였다기보다는 진리에 목말라하고 구원을 갈망하던 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갑남을녀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고 갈망을 채워줄 때, 교회는 진정 사랑의 교회로 이 땅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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