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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생명칼럼: 우리나라 현행법에 나타난 태아의 법적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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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0 ㅣ No.572

[생명칼럼] 우리 나라 현행법에 나타난 태아의 법적 권리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태아(fetus)’란 ‘체내수정에 의하여 발생하고 나서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임신 후 분만 시까지 모체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말한다. 우리 나라 민법 제3조에 의하면 사람의 권리능력은 출생에 의해 취득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태아는 권리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원칙을 관철하면 태아에게 불리한 경우가 생기므로 태아보호를 위하여 태아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는 입법태도를 취하고 있다.

 

태아의 이익에 관한 한 모든 법률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보는 일반적 보호주의(과거의 로마법, 스위스법)와 우리 민법이 취하고 있는 개별적 보호주의(한국 민법을 비롯해 독일 민법, 프랑스 민법, 일본 민법), 즉 중요한 법률관계를 열거하여 이에 관하여서만 태아가 출생한 것으로 보는 입법태도가 있다. 우리 나라는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여, 민법상 몇몇 사안에 한하여 태아에게도 그 권리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2. 태아의 법적 지위에 대한 현행법 규정

 

(1) 민법상 태아의 법적 지위

 

①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청구(제762조)

- 태아는 불법행위로 직접적인 피해자가 된 경우에는 손해배상의 청구권에 관하여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

 

② 재산상속(제1000조 제3항), 대습상속(代襲相續, 제1001조), 유류분(遺留分, 제1118조)

- 태아는 상속순위에 관하여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태아는 재산상속, 대습상속, 유류분에 대해서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

 

③ 유증(遺贈, 제1064조에 의한 제1000조 제3항의 준용)

- 유언에 의하여 재산을 타인에게 무상으로 급여하는 단독행위를 유증이라고 하는데, 제1000조 3항의 규정은(유언에 있어) 수증자에 준용한다(제1064조).

 

④ 인지(認知)

- 부(父)는 포태(胞胎) 중에 있는 자(子)에 대하여도 이를 인지할 수 있다(제858조). 그러나 태아에게는 부(父)에 대한 인지 청구권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⑤ 사인증여(死因贈與)

- 사인증여는 증여자의 사후에 효력이 발생하는 증여 계약으로서 무상의 단독행위인 유증과 구별된다. 다수설은 사인증여에 대해서도 태아의 군리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2)형법상 태아의 법적지위

 

형법상 태아의 법적 지위가 가장 문제되는 것은 ‘살인죄’의 경우이다. 살인죄의 행위 객체는 자연인인 사람인데, 이때의 사람은 생존 가치나 생존 능력을 불문하고 동일하게 취급된다. 사람이 행위 객체인 점에서 정자, 인공 수정, 낙태시킨 태아에 대한 의학적 실험이나 유전 공학적 실험은 그 윤리성을 별론으로 하더라도 현행법상 살인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인죄의 행위 객체라면 태아는 낙태죄의 행위 객체이며, 착상 전의 배아는 외국에서는 이를 보호하는 특별법이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입법화되지 못하고 있다.

 

형법은 낙태죄를 규정함으로써 사람으로서의 생명 가치와 태아로서의 생명 가치를 차별화하고 있는 것이 규범 현실이다. 이러한 생명 가치의 차별화가 종교적, 윤리적 관점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형법적 보충성의 원칙이 이러한 차별화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취지에서 본다면 사람으로서 살인죄와 낙태죄의 행위 객체는 조산 후 태아의 상태 여하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분만 개시 전에 인위적으로 출산한 태아라고 하더라도 생존 가능성이 있다면 살인죄의 객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태아의 권리능력 취득시기

 

(1) 정지조건설(停止條件說) 또는 인격소급설(人格遡及說)

 

태아로 있는 동안에는 권리능력을 취득하지 못하지만, 후일에 살아서 출생한 때에는 그 권리능력의 취득의 효과가 문제의 사실이 발생한 시기에 소급하여 생긴다는 견해로써, 태아인 동안에는 법정대리인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태아가 사산하더라도 타인에게 불측의 손해를 줄 우려는 없지만, 태아가 취득 또는 상속할 재산을 출생 전에는 보존·관리할 수 없다.

 

(2) 해제조건설(法定解除條件說) 또는 제한적 인격설(制限的人格說)

 

문제된 사실이 발생한 때로부터 태아는 제한된 권리능력을 가지지만, 후일에 사산한 경우에는 그 때에 소급하여 권리능력을 상실한다는 견해로, 태아인 동안에도 권리능력이 인정되므로 법정대리인도 당연히 허용된다고 한다. 따라서 태아의 보호에는 유리하지만, 상대방에게는 불측의 손해를 줄 우려가 있다.

* 우리 나라 판례는 정지조건설을 취하고 있다.(대판76다 1365)

 

 

4. 교통사고로 인한 태아의 보상 문제

 

교통사고로 태아에 이상이 생겨 낙태했을 때 보험사로부터 사망에 해당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법이 태아의 권리를 어디까지 보호하는지에 달려 있다.

 

민법에 의하면 태아는 사람은 아니지만(제3조), 예외적으로 일정한 권리에 한해서는, 이를테면 교통사고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해서는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제762조) 따라서 직계존속의 신체상해나 생명침해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고, 또 자신에 관한 재산상·정신상 손해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제750조) 다만, 태아의 권리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胞胎가 장차 사람이 되는 것을 최소한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우리 나라에서는 태아가 모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때 출생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태아로 있는 동안은 완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보험사들은 임신부가 교통사고 등으로 낙태한 때는 원칙적으로 낙태수술에 드는 비용은 보상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은 보상은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태아는 보험 보상이나 손해배상에 관한 한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인가? 우리 민법은 ‘태아는 손해배상 청구권에 관해서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며 태아에게도 제한적으로 권리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판례가 눈길을 끈다.

 

<사례 1>

이 사례는 93년 4월에 내려진 판례로,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상해를 입은 사건에서 태아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내용이다.

 

당시 대법원은 “사고 당시 비록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뒤) 출생한 이상(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부상으로 인해 입게 될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는 청구할 수 있다.”며 보험사에 위자료를 보상하도록 했다.

 

<사례 2>

이 사례는 <사례 1>처럼 부모가 아니라, 태아 자신이 본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경우이다. 76년 9월에 내려진 이 대법원 판례는 태아가 모체 안에 있을 때 입은 사고로 정상아로 태어나지 못한데 대해 사고 뒤 살아서 태어난 때에는, 사고 발생 시기에 소급해 권리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며 역시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

 

이 두 판례에서 공통점은 태아가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난 경우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태아가 살아서 출생하는 경우에 권리능력이 인정되며, 태아가 사고로 모체 안에서 숨져 태어나지 못한 때는 보상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태아가 모체와 함께 사망하거나 태아만 사망한 경우에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지금까지 태아의 현행법 안에서의 법적권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민법상 인정되는 태아의 지위는 권리 의무의 주체로서 완전하게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별적인 경우에는 태아의 권리를 인정하는 예외를 두고 있다. 형법의 경우 살인죄와 낙태죄의 경계선에 놓인 태아의 지위는 생명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어느 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선진국에서 낙태 허용의 한계를 둘러싸고 기간이나 요건 중심의 입법론이 다투어질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태아가 낙태죄의 행위 객체라고 하더라도 낙태죄를 처벌하지 않을 경우 결국 태아의 생명권은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낙태 현실은 우리 나라가 태아 보호의 사각 지대임을 보여 준다. 태아는 태어난 인간에게 생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완전히 수동적인 약자이다. 우리의 이기심 또는 필요성이나 무책임으로 수많은 태아가 죽어가는 현실은 분명 우리에게 낙태 행위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이 절실한 때임을 알려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아 이전 단계인 인간 배아를 이용한 각종의 복제 실험이 무한정 허용되고 있는 현실을 규제할 법 제정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월간빛, 2003년 9월호, 이창영 바오로 신부(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무국장,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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