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2008-06-01.....연중 9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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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8-06-01 ㅣ No.897

연중 9 주일 (가해)

신명기 11,18-18.26-28.32          로마 3,21-25ㄴ.28       마태오 7,21-27

2008. 6. 1. 무악재

                                                           주제 : 하느님이 하시는 명령

오늘은 유월의 첫째 날입니다.

유월은 인류를 특별한 자세로 사랑하셨고, 그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으셨던 예수님의 마을 우리가 삶에서 기억하자는 뜻으로 ‘예수성심성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마음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서양식의 표현을 본받아서, 이 마음을 ‘하트모양=♡’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 실제의 모습이 어떠한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성심성월의 첫째 날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살아야 하는지 묵상합니다. ①왼쪽이나 오른쪽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기는 하는데 혹시 반대쪽 귀로 내보내는 것은 아닌지, ②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간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아예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③그것도 아니면 양쪽 귀로 정확하게는 듣는데 아직도 세상 걱정을 머릿속에서 빙빙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판단할 일입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인지는 각자가 가장 정확하게 알 일입니다.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 집을 반석(=a huge rock)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지에 따라 세상의 삶에서는 참으로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무엇이 달라지고 어떻게 결과가 달라지느냐에 대한 것은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정도는 구별할 줄 안다는 소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시멘트가 나온 것은 그 역사(=1824년 출현)가 200년도 안 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일은 어리석은 자가 행동하는 일의 대명사였습니다. 모래를 요즘처럼 사용할 방법을 몰랐을 예수님께서는 모래 위에 짓는 집보다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는 했습니다만, 네모반듯하지 않거나 넓지 않은 바윗돌 위에 그 슬기로운 일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현명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탁으로 알아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세상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고 싶다면 반드시 따라야 할 명령으로 알아들어야 할까요? 자율권을 가진 것이 인간이고, 남들 앞에서 고집을 세우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아들어서 정확하게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을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그 말씀을 소홀히 대했을 때 만들어내는 결과는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입과 말로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는 멋있는 핑계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묻는 것과도 비슷한 소리가 ‘히브리민족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신명기(申命記)’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이 뜻인지 저 뜻인지, 이렇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 저렇게 행동해야 옳은지 구별하기가 힘든 것에 비교하면, 인간의 말로 전하는 소리, 인간의 머리로 해석한 하느님의 말씀은 알아듣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모세는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여기까지만 듣고 우리가 생각을 멈춘다면,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떤 결과를 맺겠습니까? 귀에 솔깃한 이야기만 듣고 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을 멈추면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귀를 막고 듣지 않으면서 또 귀로 들으면서 딴 생각을 하고, 우리 생각을 적용한 것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거나 우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섣불리 하는 이런 행동은 하느님을 슬프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슬프게 만들 이러한 행동은 결국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사람의 것이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인간의 생각을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권이 있다는 얘기는 그만큼 다가올 위험이 클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가 목숨을 걸고 도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한번 잃어버리고 나면 그 목숨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손등과 손바닥의 거리가 멀지 않듯이, 우리 삶에 축복을 불러오거나 반대로 저주를 찾아가는 일은 아주 작은 차이에서 시작하는 일입니다. 삶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지진이 몰아치고 폭풍우가 다가와도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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