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연중 30 주일 나해.....200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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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10-28 ㅣ No.850

  연중 30 주일 (나해)

             예레미야 31,7-9        히브리 5,1-6       마르코 10,46-52 

     2006. 10. 29.  무악재/홍은동

주제 : 세상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사는 방법

찬미예수님!

제가 여러분 앞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하는 인사를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그냥, 그저 스쳐가는 인사말의 하나로 생각하실 수도 있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로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쪽으로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찬미 예수님!’이라는 말은 ‘나는 예수님을 찬미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이 될 수도 있고, ‘우리 모두 예수님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면 더 좋겠습니다!’하는 권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수 없이 많은 일들을 겪고 삽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한 섭섭함만을 훨씬 더 많이 기억합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내가 주는 대로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친절한 설명도 이 순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런 설명을 해도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서 도움을 거절한 아픔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세일 것입니다.


그런 세상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그 대답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대답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 삶의 자세가 금방 바뀌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들은 굳센 믿음의 소유자, 바르티매오를 통해서 배울 것은 분명 있습니다.  그는 티매오의 아들로 불렸을 뿐, 개인이름이 없다는 것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었다는 소리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은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세상사에 귀를 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그만큼 귀를 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르티매오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구걸하는데 만족하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는 말을 했더라도 삶의 변화를 위한 용기는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더구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조상들이 죄를 지은 것이 많아서 그것을 물려받고 태어난 것’이라는 이론이 통용되던 세상에서는 말입니다.


둘째로 바르티매오는 끈기 있는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가 예수님을 부름으로써 그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는 주변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에 개의치 않고 자기 삶에 필요한 것을 큰소리로 주장합니다. 


셋째로 바르티매오는 자기의 바람을 있는 대로 주장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삶이 예수님을 통해서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예수님께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눈을 떠서 세상 사물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했겠지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과 마주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자기 바람을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청원은 우리가 하지만, 그 바람을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겸손한 마음자세를 가졌던 사람이었기에, 바르티매오가 남다른 자세를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살이에서 가져야 할 자세가 바르티매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목소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높이면 내가 옳은 사람이 되고,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보다 작으면 하지 않은 잘못도 내가 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할 성격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에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정의롭다는 주장,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는 주장을 먼저 하는 것이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을 올바로 이끌어야 할 신앙인들의 모임에서도 그런 일이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올바로 해야 합니다.  목소리만 높인다고 기도는 아닙니다.  루카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처럼, 기도하는데서나 신앙공동체의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자랑거리를 큰소리로 말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은 이미 세상살이에서 그 축복을 다 얻은 사람입니다.  기도는 목소리를 내서 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그저 말없이 겸손하게 머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했지만, 그 사명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실패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겸손한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겸손한 기도로 받아들인다면 그대로 따라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할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현실을 바꾸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강요에 의한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위대한 사제, 멜키체덱을 하느님께서 뽑으신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은 겸손한 자세에서 찾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내가 소리를 내서 주장하지 않아도 하느님이 아시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알아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과 비교하여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삶에서 좀 더 겸손해지고, 뜻하지 않은 행복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잠시 묵상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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