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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생명의 문화, 우리 시대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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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04 ㅣ No.814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생명의 문화, 우리 시대의 소명

 

 

먼저, 경향잡지에서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를 주제로 해서 2011년 연중 기획을 마련하였다니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생명’이야말로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생명의 문화’야말로 우리 모두가 소망하고 가꾸어나가야 할 시대적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숲을 뛰노는 다람쥐와 하늘을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 모두가 ‘생명’의 주인공들이고, 인간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며 “보시니 좋았다.”고 거듭 말씀하셨고,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시며 남자와 여자를 내신 뒤에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셨습니다.

 

 

생명경시풍조

 

우리 사회는 과연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처럼 ‘보니 참 좋은’ 그런 세상을 유지 보존하려 애쓰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래 우리나라는 남다른 생명의 문화를 간직해 온 나라입니다. 아이를 임신하면 부모는 태교에 힘썼고, 태어나면 이미 한 살로 여겨왔습니다.

 

그런 우리나라가 지금은 생명경시풍조가 만연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생명경시풍조란 말 그대로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입니다. 부끄럽게도 오늘의 우리나라는 생명과 관련하여 여러 부분에서 부끄러운 1등을 하고 있습니다.

 

출생률은 OECD 국가 중 최하위(2009년 기준 합계 출생률 1.15명)입니다. 출생률이 최하위라는 말은, 자녀 양육이나 교육의 어려움이 있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자녀를 짐스러워하고 꺼려하고 있다는 표가 아니겠습니까?

 

자살률, 특히 청소년 자살률과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2009년 매일 42명 자살 ; 청소년은 연간 446명, 노인은 매일 7명). 이 역시 우리 사회가 생명을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표가 아니겠습니까?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할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등이 쉽게 자살함으로써 자살이 미화되는 경향까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고한 태아가 희생되는 낙태율 역시 세계 상위권에 있습니다. 하루에 1천여 명의 귀한 생명이 산부인과 병원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조기낙태약이라 할 수 있는 응급피임약은 2008년 판매액이 40억 원에 이르고, 그 가운데 응급피임약 전체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노래보정’은 그 매출양이 36만 팩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낙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일부 여성들은 낙태는 여성의 행복 추구를 위한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

 

로마 법격언에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회에는 구성원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인간 사회에는 불변의 신정법, 곧 하느님께서 친히 정하신 법이 있습니다. 이 신정법에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20,13)는 하느님 실정법이 있고, 우리 양심에 새겨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만고불변의 자연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정법에 따르면 낙태는 결코 선한 일도 아니며, 혹을 떼어내는 단순한 수술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요, 태아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인간 생명은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치면서, 태아의 생명을 파괴하는 낙태는 가증할 죄악이요 명백한 범죄라고 선언해왔습니다(사목헌장, 51항 참조).

 

낙태문제는 종교인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결코 개인의 종교적 ·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사회정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낙태행위는 국가법 체계의 최고규범인 헌법 제10조가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헌법에서 가장 높은 가치인 이 ‘인간 존엄’은 ‘생명 보호’를 전제하여야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곧 생명이 있고 난 뒤에 비로소 ‘존엄’, ‘인권’, ‘행복추구권’ 등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그 시작에서부터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고, 생명권은 여타의 모든 인권에 우선하는 권한입니다.

 

따라서 헌법 제10조는 생명 보호의 의무를 국가에 명령하고 있고, 대법원도 이를 다음과 같이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잉태된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회임된 태아는 새로운 존재와 인격의 근원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므로 그 자신이 이를 인식하고 있든지, 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지에 관계없이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함이 헌법 아래에서 국민 일반이 지니는 건전한 도의적 감정과 합치되는 바이다”(대법원, 1985. 6. 11, 84조, 대법원 판례집 33권 2집, 형 497<500>).

 

그리고 헌법정신에 따라 현행 형법 제269조가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여 낙태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

 

언젠가 신자들에게 2월 8일이 무슨 날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6월 25일은 무슨 날이냐고 물었습니다. 모두가 다 그날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이라는 노래 가사에도 있듯이, 우리 민족이 겪은 동족상잔의 6·25 그날을 어찌 잊겠습니까?

 

6월 25일을 잊을 수 없듯이, 저는 2월 8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1973년 2월 8일, 이유가 닿기만 하면 태중의 아기를 없애도 좋다는 낙태허용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모자보건법으로 수많은 아기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대법원은 1973년 1월 22일, 낙태허용(Roe v. Wade)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뒤 미국의 생명수호운동 단체들은 해마다 그날을 기억하였고, 그때가 되면 국가 성지인 원죄 없으신 성모 대성당에서 수십 명의 주교, 수백 명의 사제, 수천 명의 신자들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생명수호를 위하여 철야기도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수십만의 사람들이 생명수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대법원까지 ‘생명을 위한 행진’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생명을 위한 노력들은 처음부터 다수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명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국회와 대법원 앞에서 항의하는 ‘생명을 위한 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물방울이 모여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듯이, 오늘 날에 미국인들은 전국에서 수십만 인파가 모여 “생명을 위하여”를 외치고 있고, 1천여 개의 생명운동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개미도 비록 작지만 길을 내고 소리를 냅니다. 한 마리의 개미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수많은 개미가 함께하면 분명 개미도 길을 내고 소리를 냅니다.

 

오늘날 생명을 존중하고 수호하는 운동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운동이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자 사명이며, 인류 공동체 모두의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생명운동은 몇몇 특정인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생명의 복음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메시지의 핵심”이라 말씀하시며, “교회는 날마다 이 생명의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불굴의 신념으로 모든 시대와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를 ‘기쁜 소식’으로 전파해야 합니다.”(“생명의 복음”, 1항)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참여란 방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함께 걱정하고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정신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배아와 태아의 생명을 배아 연구나 낙태약으로부터 하나라도 더 구하고 생명존중의 사회를 이루려면 바로 ‘나’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자살과 안락사 등으로 우리 사회가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사회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면 우리 모두가 생명의 문화를 향하여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생명수호를 위한 봉사활동으로써, 시간이 없어 바쁜 사람은 물질적인 지원으로써, 교육자는 청소년들을 제대로 가르침으로써, 의료인은 생명존중 의술을 실천함으로써, 부부들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인 절제를 통한 자연적인 가족계획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문화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생명존중의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요한 10,10)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자는 “천하의 위대한 일은 작은 일로부터 시작되고, 어려운 일은 쉬운 일로부터 시작된다(天下之大事 必作於細, 天下之難事 必作於易).”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작은 것의 가치를 아는 희망적인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온 인류’가 생명의 문화를 이루는 것은 어렵고 거대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를 이루는 길은 작은 것,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010년에 주교회의는 ‘생명운동지침서’를 승인하고 모든 교구와 본당에 생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으니, 2011년에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그렇게 모든 본당과 교구에 생명운동의 뿌리가 깊이 내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송열섭 가시미로 - 청주교구 신부. 주교회의 생명운동본부 총무이며, 청주교구 복음화연구소장이다.

 

[경향잡지, 2011년 1월호, 송열섭 가시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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