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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안락사와 존엄한 죽음: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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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01 ㅣ No.633

[문헌 풀어 읽기 - “안락사에 관한 선언”] 안락사와 존엄한 죽음


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을 중심으로

 

 

지난 11월 서울서부지방법원 민사12부는 뇌손상을 입고 식물상태에 빠진 75세 노모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는 가족들의 소송에 대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 대해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법원이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볼 때 이 판결은 안락사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안락사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가 1995년 펴낸 “의료인 헌장”은 “안락사는 살인 행위이며 어떤 목적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2004년 한국사목연구소의 통계 조사에서 가톨릭 신자 가운데 상당수가 안락사의 부분 허용이 바람직하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이는 안락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1980년 발표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이하 “선언”)을 중심으로 안락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엄한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안락사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

 

안락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안락사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안락사(安樂死)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안락사는 이러한 의미가 아니다. “선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저절로 또는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를 가리킨다. 흔히 안락사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약물을 주사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하며, 소극적 안락사는 특정한 치료행위를 중단함으로써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안락사의 핵심은 그것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관계없이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회칙 “생명의 복음”(1995년)에서 “안락사란 죽음을 조절하여, 정해진 시간 이전으로 앞당기는 것이며”, “실제로 논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안락사를 잘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안락사는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도 또 존엄한 죽음도 결코 아니다.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교회의 가르침에서 볼 때 앞서 소개한 판결은 말기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 중단과 관련된다. 이 판결은 회생 가능성이 매우 낮은 환자에 대한 인공호흡기 중단만을 결정한 것이지 기타 다른 치료 행위와 간호 행위의 중단까지 결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명 치료 중단은 말기 환자에게 모든 가능한 의료 행위를 다 해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말기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간호 행위와 영양과 수분 공급 등은 ‘정상적인 수단(ordinary means)’이며, 이것은 항상 제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치료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선언”은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2005년 식물 상태의 테리 시아보에게서 음식 공급 튜브 제거를 허용한 미국 법원의 결정에 단호히 반대하였다. 교황청 생명학술원 의장인 스그레치아(Elio Sgreccia) 주교는 당시 바티칸 라디오와 가진 대담에서, 시아보의 급식 튜브를 제거하는 것은 단지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며, 이 결정은 “부당하다.”고 단언하였다.

 

반면에 말기 환자의 생명을 단순히 연장시키는 장치로서 인공 호흡기, 심폐소생술 등은 ‘예외적인 수단(extraordinary means)’이며, 이것의 사용은 정당하기는 하지만 의무는 아니고 도덕적으로 선택 가능하다. 1975년 미국의 한 본당 신부는 식물 상태에 빠진 딸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것이 허용되는가를 문의한 부모에게 허용 가능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균형적 수단과 불균형적 수단

 

정상적인 수단과 예외적인 수단이라는 구분은 16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 신학자 바네스가 도입하였고, 그 이후 생명 연장 관련 논의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호성과 의료 기술의 급속한 발전 등으로 정상적인 수단과 예외적인 수단의 구분은 불명료한 면이 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고자 “선언”에서는 ‘균형적 수단’과 ‘불균형적 수단’이라는 구분을 제시한다.

 

곧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여 치료 수단들을 사용할 때 의도한 목적과 사용된 수단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존재하면 이를 균형적 수단으로, 적절한 균형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균형적 수단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무엇이 중단 가능한 예외적인 수단인지 또는 불균형적 수단인지를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항상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선언”은 “사용되는 수단에도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을 보호해 줄 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고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것은 연명 치료의 중단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엄한 죽음

 

어떤 사람들은 ‘죽을 권리’를 말하면서, 자기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죽음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온전하게 이끌 의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을 권리’란 그리스도교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는 죽음을 그리스도교적이고 인간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의 죽음이 임박한 말기 환자에게 모든 치료 행위를 다해보겠다는 의료 집착적 자세에서 벗어나 온전한 책임과 존엄성을 가지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엄한 죽음이다.

 

우리는 말기환자나 중환자에게 “지금 상태가 너무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죽여달라.”는 청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청을 할 때 그들이 진정으로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들은 죽음보다는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의료적 치료뿐만 아니라 가족, 의료인, 사회의 사랑과 온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게 우리의 사랑과 온정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선언”은 말기 환자 또는 중환자에 대한 인위적인 생명 단축으로서 안락사를 분명히 반대하며 말기 환자에 대한 적절한 치료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오늘날 생명 연장 기술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이 “선언”을 한번 꼼꼼히 읽고 성찰하기를 권한다.

 

* 홍석영 마르코 -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조교수로 있으며, 가톨릭대학교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연구위원, 국가생명윤리위원회 배아연구전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인격주의 생명윤리학”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09년 2월호, 홍석영 마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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