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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2007-01-13.....세례축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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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8-01-20 ㅣ No.887

주님 세례 축일 (가해)

이사야 42,1-4.6-7 사도행전 10,34-38 마태오 3,13-17

2008. 1. 13. 무악재

주제 : 세례의 의미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신학에서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공현을 드러내는 두 번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 첫 번째는 지난 주일에 기억한 ‘동방박사들과 관련된 공현대축일’이고, 오늘 기억하는 묵의 기도 ‘빛의 신비 1단’에서 기억하는 ‘세례가 두 번째 공현사건’이고, 세 번째 사건은 ‘빛의 신비 2단’에서 기억합니다.

 

이렇게 공현에 대한 것을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은, 그 각각의 일로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당신 속성을 보여주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이방인들에게, 두 번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람들에게, 세 번째는 당신 주변에 머물려고 했던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속성을 드러내신 사건들로 기억합니다.

 

세례는 ‘씻는 예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씻는 것은 좋은데, 우리가 신앙에서 사용할 때에 무엇을 씻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신앙에서는 이 세례를 수세와 혈세 그리고 화세로 구별합니다만, 오늘은 수세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갈릴리 호수를 거친 요르단강이 사해에 이르는 길목 입구라고 합니다. 그 장소가 어디였든지 간에,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면서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 것을 보았다’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기록합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기록된 때로부터 한참 전에 일어난 일이니, 현장증언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는 단순히 물로 씻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가 생긴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3450년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바다 도강사건으로 갑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했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가른 기적의 도움을 받아 죽음과 노예의 땅에서 벗어나 생명과 자유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이 세례의 배경입니다만, 요즘 사람들은 그 세례를 참 쉽고 편하게 대합니다. 한달이나 두달, 혹은 6개월 정도 교육만 받으면 세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때로는 교육에 빠지고, 때로는 소홀히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그런 절박한 상황을 겪지 않은 탓이지요.

 

그 홍해바다 도강사건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간을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어갔지만, 같은 역사의식이 없는 요즘 사람들은 그 세례를 아주 쉬운 것으로 대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시작이 쉬웠으니 그 다음의 과정에 대해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았고, 내가 성당에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껄!! 세례는 내가 원해서 받은 것이니, 열심히 하든 소홀히 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고, 내 마음대로 아니겠어?.......’하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 있는 우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하느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이런 일은 세상살이에서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아는 바 없는 일입니다......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오해입니다....’ 라는 소리로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태도와는 분명 다른 결과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세례를 받고 난 다음의 생활은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 둔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먼저 있었고, 우리는 응답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는데,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않으면 다가올 결실은 무엇이겠습니까?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문제입니다. 이 사실은 모른다고 내가 큰소리친다고 해서 그 매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세례는 내 삶에 하느님의 축복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제대로 해야만 결실을 제대로 맺는 법입니다. 논에 뿌려진 볍씨가 모두 똑같이 좋은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산비탈에 심어진 사과나무가 어떤 것이든지 다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하느님의 축복이 정말로 내안에 올바른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른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의 태도가 다르고, 어른으로서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면 그 태도가 또한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선택하는 성인이나 성녀들의 삶을 알고 올바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현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주보성인들의 삶을 알고 있을까요? 혹시 생일이 가까운 날이나 부르기 쉬운 이름 때문에만 선택했다면 주보성인들이 슬퍼할 일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그렇게 배운 대로 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고 사는 방법을 배워서 제대로 행동하고 사는 것보다는, 내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에게서 받을 축복은 무엇일까.....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가 세례만 받았다고 저절로 시작되거나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과 삶으로써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애써 무시하는 것이지요.

 

이사야 예언서에서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이사야예언서의 말씀을 읽어보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본받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씩이나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시고 하느님이 슬퍼하지 않으시도록, 그리고 우리 삶이 축복에 다다르도록 우리가 살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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