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2007-12-23.....대림 4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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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8-01-20 ㅣ No.884

대림 4 주일 (가해)

이사 7,10-14 로마 1,1-7 마태 1,18-24

2007. 12. 23. 무악재

주제 :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탄생을 기다려온 우리가 기쁨의 때로 만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대림 네 번째 주일이고, 구세주를 기다렸던 이스라엘 민족의 4000년의 역사에 비교하면, 이제 그 역사가 결론에 다다를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내일 밤이면, 성탄예절을 거행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괴로움이라거나 두려움의 시간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고백하는 관계인 두 사람이 특별한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그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별 탈 없이 그 장소에 나오기를 바랄 것이고, 그 기다리는 시간은 여러 가지 즐거운 상상으로 가득한 설렘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우리가 대할 수 있는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사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우리 모습처럼 생기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우리의 기다림은 어떠해야 할까요? 세상 삶에서 사랑을 느끼고 사는 사람들보다 더 큰 희망일 것이고, 세상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즐거움보다는 월등히 더 큰 즐거움을 주어야 하는 것일 텐데, 내 현실도 정말로 그러한지 살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로 결정하시고, 마리아를 통해서 그 일을 시작하신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약혼을 했던 요셉은 혼인식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요셉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자 합니다. 사실은 도망이라기보다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없는 사람을 내 삶에서 떼어내고, 자유인으로서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싶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생각한 것은 파혼이라는 방법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지 않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그 바람도 몇 순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바뀝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에 당신의 뜻을 어떤 방법으로 밝혀주실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들을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던졌을 만한 질문입니다. 요셉에게 꿈을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알리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구약성경 욥기 33장 14절 이후에도, 하느님은 ‘꿈과 밤의 환상 속에서 사람의 귀를 열어주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스라엘)도, 꿈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 현실의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하느님을 만납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나 속삭임을 듣지 못한다면, 세상의 수많은 소음들이 우리들 귀를 더 많이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꿈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요셉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에 비교해서 독서에 등장하는 아하즈 임금은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사람의 말로 들었지만, 자기 생각을 앞세우면서 보기 좋게 하느님의 뜻을 거절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다음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고 하지만, 세상 권력의 맛을 알고 누리고 있었던 아하즈 임금은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현실을 아뢰고 도움을 청하라’는 예언자의 말씀을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고, 자기 삶을 힘겹게 만드는 간섭이라고 생각했는지, 같은 말씀을 다르게 알아듣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나 때문에 하느님을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겠다고, 아예 하느님을 자기 삶에서 밀어냅니다. 하느님은 내 삶에 더 이상 간섭하시지 말라는 것이고, 이제는 하느님이 없어도 내가 내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바로 아하즈의 모습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머리좋은 사람들일수록 하느님을 잘 이용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돌리기만 우리가 행한 모든 죄악은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세상에서 한 자락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순수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영악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똑똑하게 산다고 해도, 정말로 끝까지 그 삶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들 각자의 바람과 현실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얕은 구덩이만 파도 물이 나오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덩이에서 나오는 물은 우리가 흔히 ‘지표수’라고 부르지 우물물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물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물이 아닐 지표수를 얻고도 만족한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요?

 

오늘 대림 4 주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맞아들이기에 얼마나 합당한 자세를 갖추었는지에, 내일 밤에 기억하게 될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기쁨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꿈을 통해서나 자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려올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듣게 해달라고 기도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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