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2007-12-16.....대림 3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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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8-01-20 ㅣ No.883

대림 3 주일 (가해)

이사야 35,1-6ㄱ.10         야고보 5,7-10           마태오 11,2-11

2007. 12. 16. 무악재

주제 : 내가 만드는 하느님 나라

찬미 예수님!!

어느덧 시간이 흘러 우리는 대림주간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계산은 아니라고 해도, 흔히 대림절의 기간을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4천년 역사에 비교한다면, 우리는 이제 2천년을 지내고 3천년 기(期)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비슷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우리 삶 가까이까지 도착하셨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님이 큰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아마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맞이할 분은 연약한 아기로 오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갖고 살아야 할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드러내는 세상의 삶도 쉽지는 않을 일입니다. 물론 쉽게 생각한다고 해서 현실의 삶이 쉬워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답이 어려우면 행동의 변화도 그만큼 힘들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행동이라고 전해오는 소식이 실제 자기가 기대했던 모습과 다르다고 그 현실을 답답해했을 세례자요한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얘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갖고 궁금한 나머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는 내용으로.

 

세례자 요한은 무슨 뜻으로 이 질문을 하게 했을까요?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그 질문을 들은 예수님은 딱 부러지는 정확한 표현으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분명한 대답 대신에,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는 묘한 말씀을 응답으로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자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에게로 가서 무슨 말씀을 드렸을까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말 많은 집은 장맛이 쓰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요즘 정치판을 묘사하는 딱 좋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모인 자리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생각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지고 서로 언성을 높일 것입니다. 그러면 정치꾼들은 종교와 신앙인들을 향하여,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합니다. 종교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정치가 종교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예 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정치가들이 말하는 국민이나, 신앙에서 말하는 하느님 백성이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세례자요한이 왜 예수님에게 자기 제자들을 보냈을까....하는 묵상을 하면서, 저는 사람의 냄비근성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특정한 어떤 사람의 말만 듣고서는, 그 사람이 옳은 사람인지 그른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것이 천 가지 얼굴, 만 가지 형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이런 말을 해서 남의 환심을 사고, 저 자리에 가서는 또 다른 말을 하기는 참 쉽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세례자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새로운 엘리야가 되어 선포했던 예언의 대상이 바로 예수님이었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천 개의 얼굴, 만개의 형상을 갖는 들려오는 말만으로는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기에 실상을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말로는 수없이 많은 거짓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행동에는 거짓이냐 진실이냐의 분류가 아니라, 선함과 악함만이 있기 때문이고, 드러나는 행동으로 선이나 악을 행한 다음에, 그 반대의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드러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남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갑작스레 바꿀 것은 아니겠지만, 질문을 하고 응답을 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그 중요한 점을 말하자면 세상에서 작은 사람으로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말하는 크고 작다는 것은, 몸집의 평수가 넓거나 좁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크고 작음은 하느님의 뜻을 내 몸으로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이 넘지 않아도 생각이 넓고 그 행동하는 바의 결실이 남에게도 이익을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큰 사람’이라고 얘기할 것이고, 몸집은 100킬로그램이 다 되더라도 그 행동하는 바가 옹졸하고 이기적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켜서 ‘작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드러내야할 본보기는 이사야 예언서 독서에 나온 것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 둘 모여서 ‘하느님의 나라, 메시아의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나 혼자 지금부터 서두른다고 해서 그 나라가 지금 당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좋은 일은 갑작스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우리 삶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좋은 일은 늦게 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주저앉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우리 손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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