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2007-12-09.....대림 2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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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8-01-20 ㅣ No.882

대림 2 주일 (가해)

이사야 11,1-10         로마 15,4-9       마태 3,1-12

2007. 12. 9. 무악재

주제 : 사람의 변화

찬미 예수님!!

상당히 추워졌습니다. 겨울이면 당연한 이 일도 언젠가부터 뉴스가 됐습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 덥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터인데, 그것이 언젠가부터 뉴스가 되고 새로운 소식이 된 것을 보니, 비극적으로 이야기하면 ‘빙하기가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이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는 일이 이제는 그만큼 힘들어졌구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하기가 힘들어진 것은 날씨만은 아닐 것입니다. 날씨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보다 더 힘들어지고 더 힘겨워진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람의 변화라고 할 것입니다.

 

해마다 12월 10일이 가까운 주일을 인권주일로 지냅니다. 이 말은 사람의 권리를 올바르게 생각하자는 의도로 정해진 날입니다. 이 말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삶에서 반대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의 변화만큼 그 추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대상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이성(理性)이라는 것이 있어서, 동물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고 말합니다만, 때로는 그 이성이라는 것 때문에 사람의 삶이 이상하게 틀어지기도 합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권리가 다르고, 내 이웃이 생각하는 인간의 권리가 다르다는 것이죠. 그나마 그런 평가가 그냥 말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이 두 가지 주장이 서로 충돌할 때 만들 수 있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논점이 부딪히는 것보다 더 큰 결과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세례자 요한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올바로 맞이하라는 충고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 조건으로 말씀하신 내용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내 생각대로 살았던 삶의 방식을 바꾸어 하느님의 뜻도 살피고 살라는 주문이요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요구한 세례자 요한의 기준에 맞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가리켜 요한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일 준비자세가 덜 된, ‘독사의 자식’이라는 무서운 소리를 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말 표현이 무서운 것이었을까요?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들은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반복될 수 있고, 실제로 반복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변화를 이야기 하기는 하되, 말을 한번 하고난 다음에, ‘나는 침을 바르고 한 말인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행동으로 따라야 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세례자요한은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찬 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은 미래까지도 훨씬 더 빨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사람이 변하려고 해도 확실하게 바꿀 줄 알아야 한다는 원칙을 우리가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1월 초에 신문(한겨레, 11/7, ‘무신론 주창’한 앤터니 플루-27살, 1950년에, ‘신은 있다’고 고백 /// 리차드 도킨스 ‘슬프다’)에서 무신론자의 사상변화에 대한 내용을 봤습니다. 영국의 철학자로서 27살 되던 해에 그 철학자는 ‘신은 너무 모호한 개념이고, 그 신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알 수 없는 대상이라면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신이 있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는데, 55년이 지난 후에 ‘신은 있다’는 책을 써서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갑작스레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에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고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운 모습을 변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자세를 바꾼다는 것은 학문연구에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삶이란 남이 보기 좋은 일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림 2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간부터 시작해서 벌써 한 주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도 한 주간만큼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을까요? 그 대답은 분명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삶의 자세도 다를 것이고, 생각도 다를 것이며, 드러내는 삶의 모양도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 가까이에 오신다는 것은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서 들은 것처럼, 서로 먹고 먹히는 적대적인 사이의 동물들도 화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사람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목적으로 우리가 서로를 잘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불가능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으로서 메시아,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 수는 없다고 큰소리치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한층 가까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정말로 기꺼운 자세로 모셔 들일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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