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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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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30 ㅣ No.825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어릴 적 내 기억 속에는

 

어릴 적 외국인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외국인을 볼 수 있었다. 그분은 당시 인천교구장이셨던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님이셨다. 본당 사목방문을 오셨을 때 처음 주교님을 뵙고는, ‘우와, 정말 크다. 저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파랗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견진성사 미사 복사를 서면서 주교님께서 벗어놓으신 신발을 보면서 항공모함 같다는 생각도 했다. 몰래 주교님 구두에 내 작은 발을 넣어보면서 미국 사람들은 모두 우리 주교님처럼 키가 크고, 발이 크고, 체격이 좋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인천교구에는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 신부님들이 계셨는데 가끔씩 성당에서 신부님들을 보면서 미국이란 어떤 나라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에는 아버지께서 영어를 꽤 잘하셨던 것으로 남아있다. 당시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일하시는 업종과 상관없이 영어 발음이 꽤 괜찮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는 이전에 미군부대 소속 근로자로 일하셨고, 베트남 전쟁 당시 돈을 벌려고 베트남에서 근로자로 일하신 경력이 있으셨다.

 

1960년대 말부터 베트남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수많은 이땅의 아버지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군인으로, 근로자로 외화를 벌어왔다. 우리 아버지 역시 베트남 중부의 다낭이란 도시에서 미군부대 소속 근로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가족을 위해 일하셨다. 가난이 싫어서,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가족을 책임지시려고 4년여의 짧지 않은 시간을 외국에서 일하신 것이다.

 

 

미국인 주임신부님과 함께한 보좌신부 시절

 

보좌신부 시절 미국인 주임신부님과 함께 살았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공소사목을 하고 계시지만 당시만 해도 한참 의욕적으로 일을 하시던 때라 본당사목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합리적인 태도와 철두철미한 생활을 하셨던 신부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음식 문제였다.

 

신부님께서는 음식에 전혀 소금을 넣지 않으셨고 끼니마다 올리브기름만 살짝 뿌린 샐러드를 한 접시 가득 드셨다. 신부님께서는 사제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해 주시던 주방 자매님께 당신 식사는 신경 쓰지 말고 보좌신부 입맛에 맞게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자매님은 그러실 수가 없었다. 주방 자매님은 어른이신 본당신부님 입맛에 맞게 음식을 준비하셨고 나는 몸에 좋으니 먹어보라는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한국음식만을 고집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본당신부님께 불평도 했다. 한국 땅에서 30년 넘게 사목을 하셨으면 한국 음식을 먹어야지 왜 자기네 나라 음식만 고집하느냐고 말이다. 그러고는 아직도 저 신부님은 한국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색안경 낀 눈으로 신부님을 바라보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께서 나에게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하셨다.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외국인은 주소지를 옮길 때마다 체류허가를 위해 관할 구청에 번번이 신고하게 되어있는데 신부님 역시 다른 지역에서 이사 오신 상태였기에 본당이 속해있는 구청에 당신이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고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신부님은 나에게 구청까지 동행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신부님과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관할 구청에 가서 외국인 거주 신고를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신부님으로부터 뜻밖의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신부님, 오늘 동행해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신부님 덕분에 이렇게 빨리 신고할 수 있었어요.”

 

알고 보니 이전 구청에서 신고할 때마다 수차례 고생을 하신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관련 담당자가 없다, 서류가 미비하다.” 등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여러 차례 구청에 다니면서 고생을 하셨는데, 그날은 단 하루 만에, 그것도 30여 분 만에 모든 수속을 마쳤으니 신부님께서 감탄할 법도 했다. 이 사건 이후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외국인들의 삶에 대해 뼈저리게 이해하게 된 것은 나도 타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처음 이태리에서 언어공부를 하던 시절, 음식 문제 때문에 고생을 했다. 내가 언어공부를 하던 이태리 중부의 페루자에는 한국 식당이나 한국 음식을 먹을 곳이 없었다.

 

보좌신부 시절 몸에 좋다고 먹으라던 샐러드나 스파게티, 스테이크가 날마다 먹어야 할 주식이었고, 아침에는 따뜻한 해장국이나 시원한 콩나물국 대신 커피에 빵과 치즈를 먹어야 했다.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날마다 식사 후에 바로 화장실에 가야 했고 한 달 사이에 체중도 10여 킬로그램 이상이 빠졌다.

 

주방에서 음식을 해주시던 이태리 할머니는 내 건강을 많이 걱정하셨다. 주방 할머니의 걱정 덕분인지 서서히 몸이 이태리 음식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때 보좌신부 시절 외국인 본당신부님을 질책하던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음식문화를 함부로 평가했던 나의 옹졸함을 뉘우칠 수 있었다.

 

외국인 체류허가증을 얻으려고 경찰서를 방문했을 때에는 외국인의 설움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며칠을 고생해서 서류를 준비했는데, 서류 미비로 여러 차례 반려되어 경찰서를 몇 차례 반복해서 다녔다.

 

말도 잘 못하는데 창구 앞에 세워놓고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수다를 떨 때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앞에서는 웃으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실례지만…”, “부탁해요.”를 입에 달고 있으면서 서류가 빨리 접수되기를 바랐다. 혹여 실무자의 심기를 건드려 내 서류를 누락시키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외국인으로서의 삶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체류허가증을 받았을 때 그 기쁨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체류허가증을 2년마다 갱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나는 사제란 신분 덕분에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유학 중인 일반 외국인 학생들의 경우 체류허가증을 해마다 갱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류허가증을 얻으려고, 신분증을 얻으려고, 자동차면허를 바꾸려고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것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모든 것을 다 혼자 해결해야 했다.

 

외국생활이 너무 외로웠고, 고독했고, 힘들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잘 해주리라!’ 내가 다른 나라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외국인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2011년 2월 현재 법무부 소속 출입국 · 외국인 정책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모두 123만 6,385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러한 외국인 체류자의 증가는 2001년 57만여 명에 비해 거의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불법체류 외국인까지 합하면 거의 15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의 전체 인구를 4,900만 명으로 볼 때 이는 전체 인구의 3.26%에 이르는 수이다.

 

이러한 통계에 따르면 인구 백 명당 3-4명의 외국인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체류 외국인들의 국적 가운데 가장 많은 수는 중국이며, 이 가운데 재중동포가 41만여 명에 이른다. 이어서 미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약 60만 명이며, 결혼 이민자 12만여 명, 외국인 주민 자녀 11만여 명, 상사 주재원 10만여 명, 유학생이 8만여 명에 이른다.

 

이제 더 이상 한국도 단일민족 국가라 부를 수 없는 국제화된 나라가 되었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마을에서 외국인 근로자들과 결혼 이민자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를 만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한감정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언론매체를 통해서 접할 때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피땀을 흘렸던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가정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를 위해 한국 땅에서 피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옛 처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들을 차별하고 배척해 온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저개발 국가에서 이주해 온 외국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화된 시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자신의 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더군다나 자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이나 이러한 영역의 노동 수요를 채워주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교회는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있을까?

 

교회의 사회교리에서는 이민과 노동의 관계를 말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하여 가르친다. 교회의 사회적인 가르침에서는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할 권리들을 자국인과 동등하게 누리도록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이 확산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신중하게 감시하여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98항)고 말하면서, 이주 노동자들이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차별과 억압에 대하여 국가가 철저히 감시해야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또한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회적 배척의 희생자가 될 위험에 놓여있는 여성, 비숙련 노동자, 장애인, 이민자, 전과자, 무학자 등에 대해 말하면서, 사회가 공동선을 지향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계획 능력을 통해 가능한 고용 전망을 내어놓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289항). 이처럼 교회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서도 사회적인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교회가 이주민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음을 사회교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모든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란 주제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의무의 문제란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처럼 외국인 체류자의 문제 안에서도 교회의 사회교리와 만날 수 있었다.

 

* 황창희 알베르토 - 인천교구 신부. 인천 가톨릭 대학교 교수. 1997년에 사제품을 받고, 로마 알폰소 신학원에서 석사,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에서 사회교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인천 가톨릭 대학교 교학처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4월호, 황창희 알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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