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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공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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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30 ㅣ No.372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공소생활

 

 

한국 교회는 자신의 역사를 전개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공소’라는 독자적 기구 또는 제도를 만들어 갔다. 박해시대 이래 공소는 신자들의 새로운 삶이 전개되는 현장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키운 못자리였고, 가톨릭 신앙이 토착화해 나가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공소는 신자들의 신앙이 그침 없이 증언되는 삶의 터전이었다. 삶을 통한 신앙의 증거는 그들에게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신앙의 자유를 쟁취한 이후에도 공소는 참다운 믿음이 오롯이 간직된 교회의 보물창고였다.

 

 

믿음살이와 살림살이의 하나 되기

 

공소는 새로운 믿음을 증언하는 행위들과 관련된 복합적인 단어였다. 박해시대 공소는 ‘사도시대의 공동체’와 같던 신자들의 삶이 전개되는 현장이었다. 엄혹한 박해가 닥친 후에 신자들은 다시 모여 공소를 일으켜갔다. 이곳에서 가톨릭 신앙은 유지되었다. 박해를 무릅쓰고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이전이던 1810년대 신자들의 공소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모든 이가 그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전혀 아무것도 없는 형제들에게 무슨 도움을 베풀어줄 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주니,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목격한 노인들은 그때에는 모든 재산이 정말 공동으로 쓰였다고 말한다. 신입교우 중에서 남보다 학식이 많은 이들은 자기 집안이나 이웃에 있는 무식한 이들에게 기도문과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본분으로 알았다. 끝으로 더 헌신적인 몇몇 신자들은 자기들의 지식이나 성격이나 명성으로 얻었던 영향력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은총의 충동을 따라 조선 천주교회의 재조직이라는 어려운 일에 온전히 자신을 바쳤다.”

 

이는 순교 성인 다블뤼(Daveluy, 1818-1866년) 신부의 비망록에 수록된 기록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박해시대 공소는 교우들 사이에 서로 우애가 깊었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기까지 했다. 교우들은 이곳에서 신앙의 불씨를 지펴 이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갔다. 그 타오르던 가톨릭 신앙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 가운데 하나인 소유욕마저 잠재우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게 해주었다.

 

박해시대 공소에서 이루어지던 이 관행은 개항 직후에도 계속되었다. 1889년 전라도 지방에서 전교하던 보두네(Baudounet, 1859-1915년)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자신의 사목생활에 관한 편지에서 당시

신자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었다.

 

“신입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 와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아가페(agape, 愛餐)를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신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한 천주교의 신앙과 공소의 삶은 그들의 생활을 변화시켜 갔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가꾸어갔고, 자신의 신앙에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가난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바 있는 사도들이 살았던 시대의 한때처럼, 그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회를 이땅에 재현시키고 있었다. 보두네 신부는 이러한 삶의 양식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복음에서 제시된 바 있는 일종의 이상사회를 조선땅에서 목도했다. 신입교우들이 일구어가던 교우촌 공소에서 살아가는 삶은 실현 불가능한 지난날의 이상사회가 아니었다. 여기에서 그것은 곧바로 현재 상황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감격했고, 그 자신도 이땅의 믿음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선교사와 공소 신자

 

교회의 기록을 살펴보면 공소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하기 시작한 1830년대 후반기부터 좀 더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방문하는 교우촌의 한 집에서 신자들을 만났고, 교회의 전례를 집전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 신자들의 순수한 믿음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감동했다. 그들은 이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투신했고, 그 투신에 기쁨과 자부심을 가졌다.

 

선교사들은 줄기찬 장맛비와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해 대개 7월과 8월에는 일정한 장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모방(Maubant, 1803-1839년) 신부가 경기도 땅 광주 구산(龜山)마을의 김성우 안토니오(金星禹, 1795-1841년)의 집에 머물던 때도 바로 이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그러다가 9월이 되면 다시 공소 순방의 길을 떠나 다음해 6월까지 신자들과 만남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휴식시간도 일정치 못했다.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신부는 1850년에는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무를 수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는 그해 1월부터 9월말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다녔다. 그해 7월 휴가기간을 뺀다면,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평균 60리 이상씩을 걸어다니며, 공소에 도착해서는 신자들에게 성무를 집행해야 했다. 1859년에도 그는 먼 공소를 갈 때는 간혹 말을 타기도 했지만, 몸이 쇠약해져서 하루에 40리밖에 걸을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해에도 그는 7천 리를 걸었다.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하느님과 공소 신자들을 섬겼다. 그들이 먼 길을 걸어 찾아간 집은 누추했고, 그들에게 부과된 공소업무는 과중했다. 베르뇌(Berneux, 1814-1866년) 주교는 자신의 공소사목을 이렇게 말했다.

 

“10세에서 80세 노인까지 모두가 치러야 하는 교리문답시험(찰고), 성사를 받는데 가져야 하는 마음 준비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종부와 영세를 주고 30-40명의 고해를 듣는데 하루 종일 걸리고, 밤까지 계속됩니다. 이튿날은 새벽 1시에 기상하여 미사를 드리고 미사 중에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주고, 끝으로 꾸준히 계속해야 하는 필요성과 그 방법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그다음, 날이 밝기 전에 다른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서 전날에 하던 일을 반복합니다. … 피로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내 방 가운데에서 잠에 골아 떨어져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면 버선 한 짝은 손에 쥐고 한 짝은 아직 발에 신은 채였던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렇듯 공소를 방문하던 선교사들은 늘 지치게 마련이었고, 언제나 노독(路毒)에 찌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성사를 받는데 그렇게도 열심인 것을 보고 감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 한 군데의 공소에서 성사를 다 주지 못하고 선교사가 떠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들이 선교사가 방문할 다음의 공소까지 험한 길을 마다 않고 따라와서 성사를 받기도 했다. 공소를 치르는 신자 가운데는 2백 리 3백 리 또는 4백 리나 되는 곳에서 성사를 보러 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공소방문이 선교사들에게는 수고의 시기였지만 동시에 커다란 위로의 순간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그때야말로 생동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아이들과 부인들이 외교인 부모나 남편 몰래 성세를 받고 그 본분을 지키고 있음을 보면서 자신의 노고를 잊었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그들이 선교사의 곁으로 오는 데에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남은 말

 

박해시대와 개항기 직후 공소 신자들은 당시가 엄연한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신분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형제적 사랑과 청빈에 넘쳤다. 그들은 서로 도우며 믿음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렸다. 그들은 자신의 살림살이와 믿음살이를 하나로 엮어갔다. 이렇게 몸에 밴 믿음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그들 마음에 심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소에 있던 순박한 신자들의 믿음은 선교사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공소 신자들은 선교사에게 순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주었다. 헌신적인 선교사와 희생적 신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를 만들어갔다. 박해시대 공소가 없었다면 아마 그다지도 많은 순교자가 배출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공소가 활성화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 교회는 이땅에서 토착화의 길을 외면하고 이방인의 믿음으로만 남게 되었을지 모른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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