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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안중근 토마스의 마지막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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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4-18 ㅣ No.29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안중근 토마스의 마지막 말들

 

 

중국 뤼순(旅順)에 있던 일본법원에서는 안중근의 사형을 3월 25일에서 27일 사이에 집행하려고 했다. 안중근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수난절(성금요일)에 자신도 죽게 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이 신청은 받아들여져 그의 사형일은 3월 25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일본 재판부는 그날이 건원절(乾元節; 순종황제의 탄생일) 이라는 통감부의 전보를 받고서 안중근의 사형일자를 다시 3월 26일(음력 2월 16일)로 정했다.” 이상은 한말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해 주는 ‘대한계년사’에 나오는 안중근의 죽음과 관련된 기사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의 이 소박한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는 3월 26일 대한의 독립과 겨레의 평화, 동양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다.

 

 

안중근의 유서

 

안중근은 자신이 죽을 날을 알았지만 태연자약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두고 3월 24일(음력 2월 14일),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고락을 함께했던 아내에게 유서를 작성했다. 이 유서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편지의 시작말로 쓰던 “찬미 예수”라는 기도로 시작되고 있다. 그는 어머니가 “이슬처럼 허망한 이 세상에서 불효자인 자신을 인간적 감정[肉情]에서 그렇게도 생각하시지만” 뒷날 천당에서 만나기를 기원했다. 또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들이 신부가 될 수 있도록 잘 훈도해 주기를 부탁했다.

 

안중근은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그는 아내에게 “이슬처럼 허망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부부가 되었고, 하느님의 명으로 이별하게 되었지만 …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두 아들과 딸 하나인 자식들을 아내에게 맡기면서, 장남인 분도(베네딕토)를 하느님께 바쳐 신부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아내에게 “할 말은 많지만 뒷날 천당에서 기쁜 마음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고 바랄 뿐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며 유서를 마쳤다.

 

안중근이 아내와 어머니에게 남긴 유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확고한 내세관은 잠시 거쳐가는 현세에서 대의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도 버릴 수 있다는 그의 결단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해준다. 또한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의거와 이로 인한 죽음이 ‘하느님의 명령’이었음을 유서에서 말하고 있다.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에 대한 스스로의 가치평가를 아내에게 보내는 유서를 통해 그렇게 전해주었다.

 

두 통의 유서를 작성하고 나서 밤이 지나 새날이 되어 3월 25일이 되었다. 이날은 예수 수난일로서, 원래 안중근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바라던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는 수난일에 교회의 어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먼저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으로 조선교회의 웃어른인 민덕효(閔德孝) 뮈텔 주교에게 유서를 남겼고, 영세신부인 빌렘 신부에게도 글을 남겼다.

 

 

화해와 평화의 정신

 

박해시대 이래 개화기 이후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회에서 신자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 불렀다. 특히 죄인이란 칭호는 고해성사의 집전을 통해 사죄권을 가지고 있던 성직자에게 신자들이 스스로를 낮추는 겸양의 의미를 가졌다. 그러기에 안중근은 뮈텔 주교와 빌렘에게 자신을 ‘죄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을 일본 법정의 죄인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가 아내에게 보낸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의 명’으로 생각한 데서도 확인된다.

 

중국 뤼순의 일본 법원에서 보여준 태도를 통해서도 안중근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음이 확인된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에 대한 공판이 뤼순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열렸다. 재판장 마나베 주조[眞鍋十藏]가 물었다. “저격 후 자살하거나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안중근은 대답했다. “나는 한국 독립의군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의 독립과 평화를 완전히 하기 위해 평생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때 비록 호신용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살이나 도주와 같이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 생존하더라도 일본의 난폭한 행동을 세상에 길이 알리려는 것이다. 또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악한 일이 아니다. 무슨 까닭에 자살이나 도망을 하겠는가?”

 

안중근은 결코 자신의 의거를 ‘악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고, 대명천지에 부끄러울 것 없는 떳떳한 일로 확신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러므로 그가 성직자인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에게 보낸 유서에서 스스로를 죄인이라 했던 것은 당시 교회의 관행을 따른 것에 지나지 않았고, 이토를 제거한 일을 ‘죄’로 생각하여 그러한 용어를 쓴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유서에서 먼저 자신의 일로 걱정을 끼쳐드려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뮈텔 주교 덕분에 고해 영성체를 통해 심신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유서에서 “주교님과 홍 신부님 모두가 한 마음으로 천주교를 위해 힘을 다하시고, 그 덕화가 하루하루 융성하여 머지않아 한국의 많은 미신자들이 모두 정교(正敎)에 귀의하여 오주(吾主) 예수의 깊은 자애로 그 자식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

 

이 구절을 보면 안중근은 마지막 유서에서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의 화해를 기원하면서 그 길만이 한국을 복음화할 수 있는 방안임을 말하고자 했다. 그는 빌렘 신부가 주교의 명을 어기고 자신에게 온 사실을 아마도 알았던 듯하다. 그러기에 그는 두 성직자의 화해를 간절한 유언으로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바람은 두 성직자 간의 화해를 촉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안중근 자신과 교회의 궁극적 화해를 뜻하는 일이기도 했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그는 자신이 뮈텔 주교에게도 유서를 보냈음을 말하면서 자신을 찾아와서 성사(聖事)의 길을 터주신 빌렘 신부에게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자비로우신 신부님, 나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나도 결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로 유서를 마쳤다.

 

이어서 안중근은 여러 숙부들이 보낸 격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썼다. 숙부들도 안중근에게 “찬미 예수”라는 말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냈음이 틀림없다. 그러기에 안중근은 숙부들에게 보낸 답장을 “아멘”이란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는 이미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가족과 친지 여러분에게 두루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하루의 말미를 더 얻어 숙부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숙부들이 모두 돈독한 신앙심을 갖고 한국이 성교(聖敎)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 야고보) 에게도 짧은 유서를 남겼다. 그는 “홀연히 와서 홀연히 사라지니 꿈속의 꿈이라고 할까. 꿈같은 세상살이를 그만두고 하루라도 빨리 영복(永福)의 땅에서 기쁘게 재회하자.”고 했다. 이 유서의 내용은 순전히 종교적인 것으로만 해석된다. 그러나 안중근이 가장 신뢰하고 자신과 사상적으로 일치하는 사촌동생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더욱 열렬히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를 촉구하는 이중적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안명근은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역이 되었다.

 

 

남은 말

 

안중근은 자기의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에게도 이 여섯 통의 유서를 잘 전해주기 바란다는 메모를 남겼다.

 

안중근은 3월 26일 처형 직전에도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이곳에 이른 것은 본래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니 또한 유감이 없다. 이곳에 참석한 일본 관리에게 바라건대,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친선과 동양의 평화에 있는 힘을 다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3분 남짓 최후의 기도를 하고는 말없이 사형대로 올라가 “동양 평화 만세”를 외치고 의젓하게 그의 길을 갔다. 때는 10시 4분이었으니 곧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된 시각이었다.

 

이렇게 안중근 토마스는 죽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아직도 겨레의 심중에 남아있다. 분단된 조국의 화해와 일치, 이를 통한 진정한 동양의 평화와 이땅의 복음화를 그는 아직도 바라고 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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