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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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에페소 공의회 - 하느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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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0-07 ㅣ No.137

[공의회로 보는 교회사] 에페소 공의회 -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스도론의 문제

 

삼위일체 신앙이 두 공의회에서 정립된 뒤에, 신학적인 논의가 그리스도 위격의 신비로 이어진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당연하다. 사변적 성향이 강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주로 우의적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였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428-444년) 치릴로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되도록 밀접히 결합시켜 하나의 신인적 본성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벌겋게 단 숯불처럼 신성이 인성을 뚫고 들어온다는 그의 인상적인 비유나 설명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소멸시키거나 두 본성의 공존을 혼합으로 여기게 할 위험도 있었다.

 

합리주의 경향을 띤 안티오키아 학파는 문자적 역사적 성경 해석을 그 특징으로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결합을 좀 느슨하게 이해하였다. 당시 이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성전에 머물듯 로고스는 인간 예수 안에 머문다.”고 설명하였다.

 

능변의 네스토리우스는 인간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두고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하는 것을 통렬히 반박하였다. 마리아는 자기보다 앞서, 참으로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낳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그저 “성전에 머물듯” 머무는 인간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고만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치릴로 성인은 교황 첼레스티노 1세의 동의를 얻어 열두 조항의 파문장을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냈다. “임마누엘이 진실로 하느님이라고, 따라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을 육체로 낳은) 거룩한 동정녀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지 않는 자는 파문되어야 한다”(제1항). 이는 마리아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론에 관한 문제였다.

 

 

민심에 드러난 성모 신심

 

네스토리우스는 치릴로 성인을 아폴리나리우스의 오류(가현설)를 답습하는 위험한 신학자로 보았다. 그는 교황의 최후통첩을 받기 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마침 네스토리우스에게 이단으로 몰려 쫓겨난 수도자들도 황제에게 공의회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곳의 수도자들과 일반신자들은 네스토리우스에게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는 430년 11월 19일에 모든 관구장 대주교에게 공의회 소집 서한을 보냈다. 치릴로와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성령 강림 대축일 전에 각기 관하 주교들과 함께 에페소에 도착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친구였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은 늦어진다는 전갈을 보냈다. 많은 주교들이 그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황제의 의견도 그랬다. 그러나 치릴로 성인은 6월 22일 다수파와 함께 공의회를 개회하였다.

 

다수파 주교들은 교황의 최후통첩에 답변을 하지 않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미 파문당한 것으로 여겼다. 교황이 이미 판결을 내렸는데, 새로운 토론이나 재판이 필요하겠냐는 분위기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치릴로를 재판관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요한 총대주교를 기다리지 않고 공의회의 개회를 강행한 짓은 극도의 불의라고 여겼다.

 

치릴로는 제1차 회의를 주재하고, 니케아 공의회의 신경을 확인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 대한 치릴로의 교의 서한을 승인한 뒤,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하였다. 군중들은 환호하였다. 황제의 군대가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 와중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이 도착하고, 대립 공의회가 열렸다.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그동안의 경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치릴로와 에페소 주교 멤논을 제명하였다. 황제는 그 이전의 일들을 백지화하고, 양측의 모든 주교가 참석하는 합동회의를 열라고 권하였다.

 

 

여신은 아니다

 

교황사절들이 7월 10일에 도착하여, 주교관에서 제2차 회의가 열렸다. 교황사절은 공의회를 격려하며 교황의 기존 결정을 확인하고, 황제에게 보내는 교황서한을 낭독하였다. 이튿날 열린 제3차 회의에서 제1차 회의의 결정을 확인하고,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교황의 이름으로 추인하였다. 그리고 황제에게 “온 세계가 동의한”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다. 7월 16일 “하느님의 어머니” 대성당에서 장엄하게 열린 제4차 회의에서는 안티오키아 주교들만 모인 대립 공의회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그 이튿날 제5차 회의에서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과 34명의 주교들을 파문하였다. 그리고 펠라기우스파에 대한 단죄를 확인하였다.

 

제6차 회의에서는 니케아 신경을 바꾸거나 무엇을 덧붙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7월 31일(추정)에 열린 마지막 제7차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 등에 대한 6개 규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 칭호는, 성모님께 하느님과 같은 “여신”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밝힌 것이다.

 

공의회가 끝나고, 황제는 양측의 대표자들을 소환하여 보고를 받기로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수도자들이 황궁으로 몰려갔지만, 황제는 네스토리우스뿐 아니라 치릴로와 멤논의 해임을 승인하고 이들을 모두 투옥시켰다. 그러나 치릴로 성인은 그해 10월 30일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첼레스티노 교황이 죽고 식스토 3세가 공의회의 결정을 추인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한 수도원에 머물러 있다가 이집트로 추방되고 거기에서 죽었다. 그 추종자들은 따로 떨어져 나가 이른바 경교를 세우고 중동과 중앙아시아, 몽골, 중국에까지 선교하며 오랫동안 상당한 교세를 지니고 있었다. 경교는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사라졌다. 네스토리우스가 진정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이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

 

에페소 공의회에서 하나의 작은 문제로 다루었던 펠라기우스가 기억에 남는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노마저도 성인 같은 분이라고 존경하였던 수도자 펠라기우스는 디오스폴리스 시노드의 심문에서 정통 교리와 부합한다는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 없이도?)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은, 그 제자들의 모호한 설명으로, 아담의 원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부인하는 이단으로 단죄를 받았다. 그렇더라도 일반 신자든 수도자든 인간이니까 그저 죄를 짓고 산다는 우리네의 적당한 체념보다는,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살겠다며 수덕생활에 정진하는 그런 수도자들을 지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잡지, 2007년 5월호, 강대인 라이문도(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서 편집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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