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강론자료

연중 32 주일 (나해).....2006.11.12.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11-11 ㅣ No.863

 

연중 32 주일 (나해)

             1열왕 17,10-16    히브리 9,24-28     마르 12,38-44(또는 41-44)

     2006. 11. 12. 무악재

주제 :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찬미 예수님.

 이제는 겨울로 들어선 듯합니다.  가물기는 했지만, 늦더위가 오래가고 이상기온이라는 말이 시월에는 맴돌았는데, 이번 주간은 온도가 좀 더 내려간다고 하고, 몇 년 동안은 없었던 입시한파가 온다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좋은 결과를 얻기 바라는 것만큼이나 시험을 마치고서도 웃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오늘은 십일월 위령성월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위령성월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가 필요한 영혼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때라고 교회가 정한 기간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하느님과 우리들 자신만이 잘 아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다른 영혼에게 도달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주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아는 대로 행동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가 얻을 수 있고, 우리가 기억하는 영혼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전달되게 할 수 있으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알아들은 대로 실천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이 전하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봉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이고, 열왕기독서가 말하는 내용은 ‘가난한 과부에게서 엘리야 예언자는 ’힘겨운 삶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기억할 것‘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현실 삶의 이익을 바라고 찾는 입장에서라면,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모양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성전에 예물을 봉헌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고 말할 것이고, 먹을 것이 없었던 가난한 과부에게서 자기가 먹을 빵을 먼저 달라고 했던 엘리야 예언자는 잘못된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순간에 제가 말씀 드린 것과 같은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제가 말씀드린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하십니까?  정답은 없습니다만, 대답의 방향에 따라서 우리 삶의 모양은 달라집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욕심이 많은 분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것에 앞서서 당신의 뜻을 따르라고 요구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분명히 욕심 많은 분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판단 아래에 있을 마음을 살핀다면 그 모습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당신을 향한 자리를 먼저 생각할 것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하느님께 하루를 봉헌하는 인사를 바치라고 말한다든가, 저녁에 잠들기 전에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청원의 기도보다는 감사의 기도를 먼저 하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살이에 바쁜 우리는 하느님과 적당히 타협하는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먹고 사는 일에 얼마나 바쁜지 강조하면서, 내가 가끔씩은 하느님의 뜻에서 삐뚤어지게 나가더라도 하느님은 이해하셔야 한다고 우깁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은 하느님을 벗어나서 살고 있지만, 내 마음까지도 하느님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하느님은  마음을 아실 거라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헌금함에 렙톤 두 개를 넣었던 과부나, 밀가루와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엘리야 예언자의 뜻을 따랐던 사렙타 마을의 과부는 2006년 현대에 사는 우리보다는 똑똑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현대의 사람들처럼 눈치를 앞세우면서 살았던 분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잔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느님과 내기하려는 태도는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내 삶에 이러저러한 축복을 내려주시면, 내가 그 보답으로 이러저러한 행동으로 감사드리겠다는 허황된 조건이나 헛된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보 세 번째 면에 나오는 여인의 이야기처럼, 어떤 사람에게나 진부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삶의 정성에 의한 것이지, 하느님과 한판 붙는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좋은 일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합니다.  가난한 과부가 봉헌을 제일 많이 하겠다는 생각으로 동전 두 개를 봉헌물로 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였기에 사렙타 마을의 과부가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들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우리네 삶에서 바뀌고 달라질 것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봉헌하면, 내 삶이 지금과는 달리 무엇이 바뀌겠는지 알려주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알려주겠다고 말을 꺼내는 것이 무모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정해놓은 방법과 모습대로 하느님께서 그대로 움직이셔야 한다고 우리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말로는 우리가 하느님께 부탁하고 강요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바람대로 하느님이 움직이시는 분이겠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하느님을 향하여 ‘당신은 왜 그리도 욕심이 많고,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바라십니까?’ 하고 묻고 싶어도,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가 더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그분과 함께 하는 일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할 일입니다.



39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