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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쟁사회: 산위의 마을의 행복 프로젝트 - 인격주의 교육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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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9-23 ㅣ No.869

[경향 돋보기 - 경쟁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산위의마을’의 행복 프로젝트 - 인격주의 교육을 위하여

 

 

기술 발전이 놀랍다. 스마트폰에 전 세계 정보가 실시간으로 전 해오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미사를 드리고 회의도 하고 외국에 사는 친지들과 화상 통화도 한다.

 

누가 지금은 누구와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에서 무엇을 사먹었는지 알 수 있는 추적 시스템, 전 세계 곳곳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위성지도, 조종사가 없는 무인폭격기, 얼굴을 바꾸는 성형술이 더 이상 놀랄 거리가 아닌 과학 기술의 시대다. 외국에 가지 않고도 그 나라의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고, 이제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도 기능하다. 어떤 것도 가능한 달인의 사회다. 오늘도 연구소 박사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기술 상품을 출시하려고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기술

 

우리 ‘산위의마을’에서도 현재 연구 개발에 몰두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다.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30여 명의 가족들이 온 힘과 믿음을 다해 치열하게 연구하고 있는 것 첫째는, ‘돈 벌기 위해 애쓰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기술’이고, 또 하나는 ‘경쟁하지 않고도 함께 승리할 수 있는 기술’이다.

 

기술 개발이 성공하는 날 세상이 크게 요동칠 것 같다. 서울대와 카이스트에 응시생 미달 사태가 생길는지 모르겠다. 사설학원도 줄어들고, 삼성, 엘지, 현대, 금융기관 같은 대기업에는 1억의 연봉을 제시해도 사원 지망생이 별로 없을는지 모른다.

 

아무튼 사람들은 늘 싱글벙글하며, 뉴타운 재개발 공사들은 사라지고, 청년 학생들의 손에는 고전과 책이 떨어지지 않고, 도시의 골목에는 아이들 소리가 살아나고, 중소 제조업체들은 생산에 활력을 얻고, 농촌에는 젊은이들이 와서 영농후계자 경쟁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기술이 세계 특허로 수출되면 미국과 북한과 무슬림과 유다인들이 화해하며 평화공존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조금 맛이 간 사람들로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건 섭섭한 일이지만, 스승 예수님께서도 그런 오해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괜찮다.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고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확인되었다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내용인데 신앙인들은 믿지 않는 것 같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1-33) 하셨는데, 왜 스승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걸까?

 

 

상품주의 교육과 인격주의 교육

 

예수님의 행복론을 믿지 않는 이유는 돈, 권력, 경영 성공, 사회적 지위가 더 확실한 행복의 조건이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행복론이고 신앙이다. 그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맘몬(Mammon)이라 하셨다.

 

세상의 확실한 행복을 얻으려고 공부하고 자격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모두가 공부를 해버렸으니 박사학위가 있어도 시간강사 자리 하나 얻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고등급으로 인정받으려면 명문대 간판과 실력이 더욱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상품주의 교육이다. 그들은 상품주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본다. 가족 친구의 관계와 사랑과 결혼을 비롯한 모든 대상의 인간들이 얼마나 상품적 가치를 지녔는지 ABC 등급으로 평가하는 습성을 지닌다.

 

교육이란 사람을 사회적 삶에로 성장시키는 일이다. 가정이 건강한 몸을 만들어 내어 놓으면 스승은 예의염치의 도덕과 인의예지의 윤리를 함양하고 앙양시키면서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한국 전통의 커리큘럼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으로 빈자와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부정한 일에 부끄러움을 알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 겸양으로 관계적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런 가치 지향이 인격주의 교육이다.

 

산위의마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단양 가곡초등학교 보발분교인데 전교생이 12명이다. 본토 아이들은 4명이고 8명은 산위의마을 아이들이다. 선생님은 세 분으로 한 교실에서 두 학년을 복식수업으로 담임한다. 학업이 떨어지는 아이는 특별 지도를 해주시기도 한다. 서너 명을 두고 가르치기에 도시 학교처럼 적당한 은폐와 익명의 생활이 없다. 학생의 성품과 심리 상태와 태도가 100% 노출된다. 그래서 아이에 대해서 부모보다 더 잘 알게 된다.

 

 

노동 없는 교육, 희생 없는 제사

 

도시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를 못했더라도 우리 마을로 오는 순간에 전교에서 1등이나 2등을 한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반장 부반장을 서로 돌아가면서 하게 된다. 한 학년이 한두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졸업식에는 한 사람이 보통 세 개 정도의 상장과 장학금을 받게 된다. 상장은 많은데 받을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실력으로 전교 1, 2등 한 것은 분명하고 상장과 장학금도 교무회의의 합법적 결정으로 받는 거다.

 

학교가 끝나고 마을로 돌아온 아이들은 소 염소 닭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 사료도 주고, 계란도 꺼내오고, 닭똥도 치워야 한다. ‘놀토’에는 밭에 나가서 일도 거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가축과 채소와 흙 위에서 숲 사이의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마을 아이들 생활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노동을 강조한다. 노동이 인격적 성숙을 이끌어준다고 믿고 있다.

 

본래 사람에게는 노동과 학습이 하나였다. 필요한 지식은 일과 농한기를 통해서 얻었다. 학생을 공부만 하는 직업으로 규정하고 노동을 버리게 만든 것은 근대 교육이었다.

 

인도의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배의 근대 교육을 바로 잡으려고 자신의 후계자인 비노바 바베와 함께 세바그람 아쉬람에 ‘나히탈림’이라는 대안학교를 세웠는데, 밀, 목화, 감자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하게 했다. 간디의 물레는 수공용 기계를 넘어서 인도 문화와 교육의 주체성이고 독립의지이며 정신이었다. 지금도 세바그람 아쉬람에서는 아침저녁 기도 때 물레를 돌리는 이들이 있다.

 

 

“어른께서 먼저 드십시오”

 

공동체 사회는 자녀들의 인격적 성장에 노동이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세계 어느 공동체를 가나 어린이들이 양을 돌본다든지 풀을 뜯거나 물건을 들고 심부름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모와 공동체의 일을 돕는 데서 공동체 삶의 관계와 믿음이 이루어진다.

 

노동을 통해서 일과 삶이 일체라는 것을 깨우침으로써 공동체 세계관을 지니게 되고, 사물을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을 얻게 된다. 그것이 영성과 인격주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야마기시 공동체가 있다. 공동체 교육 이념에 따라 어린이들에게도 일을 시킨다. 그것을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들은 고발 프로그램으로 제작하여 아동학대라는 딱지를 붙여 방송했다고 한다. 어린이는 노동해서는 안 되며 학생은 공부만 해야 한다! 그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저널리즘의 눈에는 노동의 영성과 창조적 야성이 보이지 않고 아동학대 행위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노동이란 천한 것이고 배우지 못한 이들의 것이니 그에게 기자 정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노동 없는 교육은 희생 없는 제사와 같아서 그 분향이 하늘에 오르지 못하니, 지식은 있지만 영혼이 없다.

 

우리 마을에서는 공동식사를 하는데 삼종기도를 마치면 손을 잡고 식사 전 기도를 노래한다. “이는 나의 몸, 받아먹으라. 이는 농부의 땀, 생명의 양식!”

 

음식과 노동과 성체성사를 하나로 고백하는 것이다. 식사는 뷔페식인데 어른이 먼저 뜨고 난 다음에 아이들 순서다. 어떤 손님들은 아이들이 먼저 들게 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우리 생각은 다르다. 아이들은 늘 자기가 0순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되어 있는 줄 안다. 잘못된 교육이었다.

 

어린이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큰 세계의 틈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어야 한다. 자기중심 세계관으로 성장한 아이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의염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야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의염치가 없으면 공중도덕과 윤리의식을 기대할 수 없고 직업윤리도 죄의식도 없게 된다.

 

 

‘삼성, 검찰, 조중동, 김앤장…’

 

소망대로 서울대나 카이스트에 합격했다고 하자. 그 다음은 한국 사회 최고의 엘리트로 배출되고 최고의 연봉을 받을 순서인가? 각각 자기 분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자리를 얻었다고 하자. 가령 ‘삼성, 검찰, 김앤장, 조중동’ 같은…. 두 가지만 질문해 보자.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의 직장은 한국 최고 경영과 매출과 권력과 연봉의 직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슨 일에 종사하는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윤리적인 직장인가? 그 직장에 다닌다는 것에 부러운 눈길도 있겠지만 조금 이상한 시선, 가령 영혼이 있는 인간들일까 하고 바라보는 듯한 그런 눈빛을 받고 있지는 않는가?”이다.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의 직업은 사회적 발전을 위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 직업을 통한 삶과 노력이 세상의 누구에게 어떤 도움과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이다.

 

해마다 명문대에서 최고의 엘리트들이 배출되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좋아졌다고 여기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기업의 비밀 개발에 충성하는 역할로 비인간화에 종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이 이렇게 악화일로로 갈 수 있는가? 공부로만 살아온 인생이 허무하지 않아야 할 텐데….

 

어린이들의 장래 희망은 과학자가 참 많다. 그러나 최고의 두뇌, 최고의 과학자들 중에는 재벌과 대기업의 머슴이 되어 메이저 기업의 프로젝트를 맡아 그들의 장사와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이들이 있다. 각종 전쟁무기와 유전자 변형 종자들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농산물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식용유가 어떻게 아이들의 건강을 망치는지에 대해서 밝혀주지는 않는다. 이미 직업윤리가 없는 ‘좀비’들인 것이다. 그런 과학자가 되려고 초등학생부터 수석을 차지하면서 살 필요까지 있는가?

 

 

인격주의 교육의 모범인 성가정

 

상업주의 교육은 맘몬의 것이다. 예수 제자의 삶에 상업주의 가치관은 맞지 않다. 소비문화와 사치와 환락을 주도하는 악령의 노예로 살게 하는 교육이다. 인간도 하느님도 돈으로 가격을 매기게 하는 타락한 교육이다. 예수 제자의 삶으로 추구해야 할 자녀 교육이 인격주의 교육이다. 인격주의 교육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교육일 뿐 아니라 부모 자신을 성찰케 하는 세례의 갱신이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2,40).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2,52). 이 기록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양육하고 가르치신 교육이념 그대로이다!

 

신체의 건강, 하늘과 땅과 삶의 지혜,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받는 사람! 이 덕목은 모든 신학교에서 사제양성의 교육이념이 되었다. ‘건강, 지식, 영성’ 이다.

 

부모의 삶이 자녀의 삶이 된다. 책 읽는 부모의 모습은 아이에게 책을 가까이 하게 만들고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은 자녀가 힘들 때 기도할 수 있게 해준다. 불쌍한 이를 돕는 부모의 모습은 자식들을 나눔에 자비롭게 하고, 술에 취해 부부 간에 폭언하는 모습은 자녀의 결혼생활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우리 어머니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거짓말하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으셨다.” 또는 “저녁 10시에는 늘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란 것을 잊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런 기억과 회상이 자녀를 지켜주는 진정한 교육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를 구하자

 

유학을 보내는 자녀에게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당부하는가? 돈 떨어지면 즉시 연락하라고?

 

길 떠나는 자식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현자의 훈계가 있으니 꼭 일독을 권한다. 토빗기 4,3-21이다. 토빗은 성공이란 부자나 권력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선 의인이라 보고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데서 찾으라 한다. 자식에게 참된 행복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교육이념이다. 인격주의 교육이념은 ‘하느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 완전한 인간을 지향하는 삶’이다.

 

무소유의 신앙인 공동체 산위의마을은 오늘도 밭농사에 분주하다. 우리 마을의 행복 프로젝트가 성공할 날을 기원하면서….

 

* 박기호 다미아노 - 신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소속으로 단양에 있는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마을에서 살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9월호, 박기호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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