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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조선 천주교의 기원 - 다블뤼 신부가 인용한 정약용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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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2 ㅣ No.88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조선 천주교의 기원

 

다블뤼 신부가 인용한 정약용의 기록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경험을 축적해 나갈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앞서간 사람들의 경험까지도 정리해서 전해주고 있다. 한 사회의 공동체험은 역사로 정리되어 전해졌다. 역사를 통해 간직된 집단 기억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나아갈 길을 찾는 데에 지침을 주고 있다.

 

박해시대 조선의 천주교회에서도 자신의 역사적 체험에 대한 기억을 중시했고 이를 간직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박해시대 조선교회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밝히고 전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여 박해의 와중에서도 당대 교회사에 관한 기록들을 수집 정리하였다. 이 작업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다블뤼 신부였다. 그는 조선교회의 초창기를 서술하면서 다산 정약용이 남긴 기록들을 수집해서 인용하고 있다.

 

 

다블뤼 신부가 수집한 교회사 자료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였던 다블뤼(1818-1866년) 신부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을 통해 입국하여 1866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조선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그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명에 따라 1856년부터 신심서와 교리서를 편찬하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에 “조선 순교사”를 편찬할 계획을 세워 교회사 관계 사료를 수집하였다. 이 사료수집과 정리 작업은 1859년경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두 명의 전담인력을 채용하여 자료의 정서와 번역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고 순교자에 관한 구전을 모으고,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목격증인들의 증언을 수집하려고 3개월 동안이나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다블뤼는 순교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기 위해서 교회측 자료뿐만 아니라 관변측 자료와 그 밖의 한문자료들도 광범하게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다블뤼는 관헌들에게 압수되어 천주교 신도들은 접할 수 없게 된 ‘황사영 백서’를 비롯한 초기 교회사에 관한 자료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블뤼는 ‘조선 천주교회의 기원’ 내지는 1801년의 박해와 관련된 문헌자료들도 수집했다. 이때 다블뤼는 정약용이 저술한 “조선 천주교의 기원”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자료가 수집된 때는 1856년에서 1858년 사이의 어느 때였다.

 

다블뤼는 1858년 11월 7일자로 파리 외방선교회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수집한 다산 정약용이 기록한 자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증인은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가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알려진 지식인이며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 모든 일에서 등장하며, 그리고 명확한 여러 사건들의 기록에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의 배교와 그의 형제, 친척, 친구들의 배교에 대해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기록의 진실성을 인정하게 하는 좋은 요인입니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 그의 책에서 다른 전승(傳乘)들에 의해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어떤 사실도 찾지 못했음을 단언합니다. 이 책은 그의 집에 묻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하고도 이 책에 관해 논하려 하지 않아서, 아주 드문 예에 속하지만 이 책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적 전승이 모두 이 책에 수록되어 있고, 또 다른 증거 자료가 이 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정약용이 기록한 “조선 천주교의 기원”

 

다블뤼는 조선교회사에 관한 광범한 자료수집 과정에서 정약용 가문의 가장 문서에 포함되어 있던 천주교 관계 사료를 수집하여 사용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우리가 ‘조선 천주교의 기원’에 관한 사건들의 거의 대부분을 인용하고 있는 자료들은 우리가 자주 언급하고 있는 정약용이 수집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다블뤼는 이 비망기에서 정약용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정약용의 세례명은 요한인데… 종교적인 몇몇 글을 남겼다. 우리는 이 기록들을 베끼거나 다시 연결한 것뿐이다. 불행하게도 그 글들은 너무 간단하기는 하나 매우 잘 씌어져 있다.” 또 다블뤼는 “요한이라고 하는 정약용이 배교한 것은 사실이다. … 그는 ‘조선 천주교의 기원’의 저자인데 그 책은 보존되어 있다.”고 하여 정약용이 지은 그 책이 “조선 순교사 비망기”가 집필되던 당시까지도 남아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박해시대 한국교회사에 관한 대표적 저서는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이다. 달례의 저서 가운데 초기교회에 관한 부분은 다블뤼가 지은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1표 2서’로 불리는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그리고 “흠흠신서”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시문집인 “여유당전서” 안에는 단편적 기록으로나마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회사 이해에 필요한 주요 자료들이 남아있다.

 

자신과 주변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던 그로서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천주교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정약용은 1818년 유배지 강진에서 풀려나 향리에 은둔하며 저술에 종사하다가 18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 기간 중 어느 때에 자신의 체험에 기초하여 조선의 초기 천주교회에 관한 기록을 남겼으리라 추정된다.

 

 

남은 말

 

다블뤼는 자신이 수집했던 자료들에 근거해서 프랑스어로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지어 파리 외방 선교회 본부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1863년 다블뤼가 살던 집에 불이 나 그동안 수집했던 자료들이 모두 타버렸다. 이때 정약용이 기록한 “조선 천주교의 기원”에 관한 자료도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까지 알려진 다산 정약용의 문헌 가운데에서는 이 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블뤼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정약용이 조선 천주교회의 초창기에 관해 서술한 자료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정약용은 우리나라 실학사상의 큰봉우리이다. 정약용이 조선후기 사상계에 남긴 영향은 그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헤겔(1770-1831년)이 유럽의 근대철학계에 남긴 역할과 비등했다.

 

오히려 그 사고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정약용이 해겔보다 더 넓을지도 모르겠다. 정약용은이 넓은 사고의 일환으로 자신이 체험했던 바를 기록하여 조선의 초기 천주교사를 밝혀주었다. 그가 남긴 기록을 거울삼아 오늘의 신도들은 초기교회의 열정과 소망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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