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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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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882

[경향 돋보기 -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


일반적으로 평화는 상호 간의 분쟁, 갈등, 대립이 없이 화목하고 안정되어 고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과 가톨릭 사회교리는 신앙인에게 이 용어가 더 풍요롭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가르친다.

평화는 “하느님의 근본 속성”이기에 모든 피조물은 평화를 염원하고 서로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훨씬 넘어서서, 생명의 충만함”이며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의 하나”이고 “축복의 결과”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풍요와 안녕과 번영과 마음의 안정 그리고 충만한 기쁨을 낳는” 구원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평화는 피조물이 하느님과 맺는 흠 없고 올바른 관계를 맺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 관계가 인간의 그릇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깨어질 때 평화는 사라지고 “피 흘림과 분열”과 같은 폭력이 나타나게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488-489항 참조).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서를 비롯하여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아 시대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이사 2,2-5; 11,6-9; 시편 85,9 참조)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시기에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 증오의 벽을 허무시고 그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고 선언한다(에페 2,14 참조).

또한 평화는 예수님께서 남긴 유언이자 선물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고 당부하셨고(루카 10,5 참조), 산상설교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으며(마태 5,9),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라고 인사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평화를 추구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 안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다

첫째,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공정함에 기초한 사회 질서 확립을 통해 평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사목헌장, 78항).

이사야는 “정의의 결과는 평화가 되고 정의의 성과는 영원히 평온과 신뢰가 되리라.”(이사 32,17) 하고 선언한다. 고전적 의미의 정의는 각자의 몫이 각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을 때 평화는 위협받는다. 특히 생명권과 양심의 자유를 비롯하여 인간으로서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존엄하게 살아가도록 보장하는 기본 권리인 인권을 지키고 증진시키는 일은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본질적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참조).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백만 부 이상 팔리고, 우리 정부가 ‘공정사회’를 국정기조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부정과 불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않은 사회는 억울한 피해자를 낳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증오는 분쟁의 씨앗이 되어 사회의 평화를 위협한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정치의 영역에서 정의가 실종되고,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훼손되는 역사를 겪어 왔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정치의 목적은 정의와 공동선을 실현하는 일이며, 교회는 정치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지 않지만 신앙이 지닌 “정화하는 힘”을 통해 “정치생활에서 양심을 형성하도록 돕고, 정의의 참된 요구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도록 촉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8항).

감시 역할과 적극적 투표 :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의의 열매인 평화를 이루는 구체적 방법은 우선 부당한 권력 남용에 대한 언론과 시민사회의 감시 역할과 적극적 투표 등을 통해 정치가 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촉구하며 주권자로서의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공정과 정직 : 일상에서도 개개인이 자신의 부당한 욕심을 다스리고 매사에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순응하면서 불의와 부정에 눈감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자.

자연과 생태계 보존 :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일도 정의의 열매로서의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착취는 자연환경에 대한 불의한 폭력이다. 자연은 인간이 마음대로 착취할 수 있는 단순한 도구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자 작품이며 그 신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이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도록 섭리하셨고, 동시에 인간에게 피조물들을 조화롭게 발전시키고 돌볼 임무를 맡기셨다.

인류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생태계를 착취하고 파괴한다면 이는 하느님이 부여하신 창조질서를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후대에 자손들이 누려할 몫까지 빼앗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자연환경이 훼손되어 조화로운 질서가 깨지면서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물, 공기, 음식이 오염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연환경에 저지른 불의가 결국 ‘환경의 역습’을 통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십시오.”라고 호소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평화는 사랑의 열매이다

둘째, 평화는 또한 사랑의 열매이다. 성경과 교도권은, 정의의 역할은 평화를 위한 장애물을 없애는 일이기에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정의가 줄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정당한 몫까지도 내어놓는 사랑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사목헌장, 78항; 비오 11세 회칙, Ubi Arcano 참조).

애덕 실천 :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39-41). 이 복음 말씀처럼 상대방의 요구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내어주는 애덕 앞에서는 다툼이 생길 수 없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자신의 몫을 챙기려고 해서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다. 평화는 타인을 배려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형제애의 열매라는 것이다.

폭력 거부 : 사랑의 열매로서의 평화는 구체적으로 비폭력, 용서와 화해, 일치의 길을 통해 추구될 수 있다. 우선 평화는 폭력을 거부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폭력은 악이며, 거짓이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인간의 존엄성, 생명, 자유를 파괴한다고 선언하였다(「간추린 사회교리」, 496항 참조).

2010년 개봉되었던 덴마크 영화 “인 어 베러 월드(In a Better World)”는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며, 용서와 화해만이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엄마를 잃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또 다른 폭력으로 풀어보려고 했던 소년 크리스티앙은 결국 친구 엘리아스의 생명마저도 위험에 빠뜨리지만 엘리아스와 그의 아버지 안톤의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행한 따뜻한 포옹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게 된다. 안톤은 또한 자신의 아들 앞에서 자신을 폭행했던 수리공에게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위해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셨던 것처럼 평화의 일꾼인 그리스도인들은 일상 안에서 사소한 폭력도 거부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타인의 권리와 사회적 의무를 존중한다는 조건을 지키면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수단”을 택하라고 권고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06항; 사목헌장, 78항). 이는 강자의 힘의 논리 대신 비폭력을 택하라는 것이며,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십자가의 사랑이 결국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는 부활 신앙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민족과 국가 간 또는 종교 간의 불화와 다툼은 전쟁과 테러라는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로 벌어지면서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교도권은 이미 여러 문헌들을 통해 “전쟁의 야만성”을 비난해 왔고, 전쟁이 국가 간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적절한 길이 될 수 없음을 천명해 왔다(「간추린 사회교리」, 497항). 다만 엄격한 조건하에서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려는 정당방위와 무고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인도주의적인 전쟁만을 예외로 한다.

군비 경쟁 지양 : 평화를 위한 전쟁 억지의 수단이라는 명분으로 군비 경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도 적지 않은데, 지나친 무기 비축이나 무분별한 무기 거래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면서 “군비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고 교회는 경고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15항).

우리나라의 현실도 지난 60년 동안 남과 북은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여 치열한 군비 경쟁을 해왔는데, 특히 북쪽은 주민들의 굶주림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남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경제 · 평화 연구소’가 5월 25일 펴낸 ‘세계평화지수(GPI) 2011’보고서에 따르면, ‘평화로운 나라’ 순위에서 남한이 전 세계 153개 나라 가운데 50위, 북한이 149위를 기록하였고, 3년 연속 그 순위가 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략문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비 지출은 2009년 241억 달러로 세계 12위 규모이고, 북한 역시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70억 달러를 지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20년 이상 지속된 식량난으로 어린이들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결과 북한 군인의 입대 기준이 1994년부터 신장은 148cm, 체중은 43kg으로 낮아졌다. 남북의 대립으로 그동안 쏟아부어온 엄청난 군사비와 민족 역량을 민족 번영과 평화를 증진시킬 수 있는 곳으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북의 오랜 대립은 또한 전쟁 재발에 대한 불안과 상호 적대감을 야기하고, 상호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이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고통 속에 살도록 만들고, 민족 간의 이질성과 문화적 차이를 넓힘으로써 통일 이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또 다른 사회적 비용을 키우고 있다.

민족의 화해를 위한 노력 : 한국교회는 주교회의와 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을 위한 대북 식량 및 의료 지원과 민족의 화해를 위한 기도 운동, 그리고 새터민을 위한 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폭력적인 적대와 대립으로 점철되어 왔던 분단 시대를 극복하고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로 나아가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소명이다. 통일 정책을 주관하는 정부의 열린 마음과 지혜로운 대북 정책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개개인도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함께 북한 어린이와 결핵환자 돕기 등 인도적이고 평화적인 지원 단체에 후원하고,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정착한 새터민들이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중요한 실천이다.


평화를 위한 기도

그리스도인은 비폭력과 인내의 정신으로 분쟁 대신에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며, 기도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마음을 열어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할 뿐만 아니라, 존중과 이해, 존경과 사랑의 태도로 다른 이들을 만나게 해준다. 기도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모든 평화의 참된 친구들, 곧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다양한 환경에서 평화를 증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 특히 ‘그리스도교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는 평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참된 투신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이다”(「간추린 사회교리」, 519항).

마지막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그리스도인들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가져오는 ‘평화의 도구’로서 살아가도록 다짐하며, 우리 사회에 정의와 사랑이 넘쳐흘러 참된 평화가 이룩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자.

* 박정우 후고 - 서울대교구 신부. 1991년 사제품을 받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박정우 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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