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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복음서 번역을 위한 노력 - 사사성경(四史聖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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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8 ㅣ No.363

[신앙 유산] 복음서 번역을 위한 노력 : 사사성경(四史聖經)

 

 

머리말

 

박해시대에 우리 나라 천주교에서 간행한 여러 책자들에서는 ‘그리스당’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는 ‘크리스찬’ 또는 ‘크리스티앙’에 해당되는 단어의 번역이다. 이 번역어의 마지막 음인 ‘당’은 한자어의 ‘무리 당(黨)’을 연상시켜 주는 발음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서양어를 전혀 모르던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라는 연상으로 쉽게 기억되고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

 

이땅의 ‘그리스당’들이 자신의 신앙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 했다. 그러하여 그들은 우리 니라에 교회가 세워진 직후부터 성서를 부분적으로나마 번역해서 읽고 보급해 나갔다. 그 결과 “성경직해”(聖經直解)가 번역되어 나오게 되었다. 그 뒤 구한말 개신교 선교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리고 이와는 달리 천주교에서는 독자적으로 성서를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고, 그 결실로 “사사성경”(四史聖經)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성서번역의 선구적 역할

 

1784년 조선에 천주교회가 세워진 이후 이땅에서는 곧 성서를 비롯한 교회서적을 번역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의 일반인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한문서적을 읽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문으로 된 서적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을 전수받고 기도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에게 한문으로 된 기도는 마치 일종의 주문(呪文)과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종 기도서를 비롯한 교리서들을 한글로 번역해 주기를 요구했다. 여기에서 적어도 1787년 이후부터는 한글로 번역된 기도서와 교리서 등이 본격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의 과정에서 압수된 한글서적 가운데 “성경직해”가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경직해”는 주일과 주요축일에 봉독되던 복음만을 뽑아서 수록한 발췌본 성서였다. 이 “성경직해”에는 사 복음서의 30.68%가 발췌 수록되어 있었다. 이 책은 이미 18세기말부터 번역되기 시작하였으며, 1801년의 박해과정에서도 한글본 “성경직해”가 압수된 기록이 있다. 그리고 1853년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신도들에게 이 책이 널리 읽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성경직해”는 1892년 이후 활판본으로 간행되어 더욱 넓게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발췌본 성서로는 신도들의 성서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서 성서를 완역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박해시대 이래로 “천주교성교공과”나 “일과절요”를 비롯한 각종 기도서들이 번역되고 있었다. 이 기도서 안에서도 성서의 몇몇 구절들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었다.

 

 

개신교의 성서번역

 

19세기 후반기 개항 이후의 조선사회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신장되어 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선교를 시도한다. 그들은 성서의 중요성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성서번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2년부터 성서의 일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그리고 1887년에는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가 완간되었다. 이때 간행된 성서를 로스 본(Ross 本)이라고 한다. 이 번역은 이응찬(李應贊)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한문본 성서를 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을 로스 선교사가 헬라어 성서, 흠정영역성서(欽定英譯聖書)들을 참조하여 수정한 것이다. 이 성서는 묄렌도르프 등의 협조를 얻어 인천항을 통해서 조선에 밀반입되어 배포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 뒤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李樹廷)이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우리 나라 개신교 초창기 선교사인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 간행한 복음서를 가지고 조선에 선교하기 위해서 입국했다. 선교사가 처음으로 파송되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서를 가지고 입국한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렇듯 한국 개신교에서는 성서를 존중하고 이를 번역하여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일찍부터 기울이고 있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글본 신약성서 완역본을 다시 간행한 해는 1904년이다. 그 동안 개신교 선교사들은 17년에 걸쳐 성서 번역작업을 추진했고 우선 선약성서를 완간하게 되었다. 1911년에는 한글본 구약성서가 공간되기에 이르렀다. 개신교 형제들은 그 뒤에도 성서를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6년에 개역판을 간행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서번역을 갈고 다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사사성경”의 간행

 

우리 나라 천주교회에서도 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10년에는 “사사성경”이 간행되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도 뒤늦게나마 사 복음서의 완역본을 갖게 되었고, 천주교 신도들은 발췌본이 아닌 완역된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게 되었다. 이 “사사성경”의 속표지에는 ‘탁덕 한 바오로 역주, 감목 민 아오스딩 감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복음서의 역자는 한기근(韓基根, 1868-1939년) 신부이며, 이 책의 간행을 당시 조선교구장 민덕효(閔德孝, Mutel) 주교가 감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크기는 14.5cm×18.5cm, 445쪽, 양장본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책은 1971년 공동번역 선약성서가 나올 때까지 육십여 년 동안 한국 신도들에게 읽혀졌다.

 

사 복음서의 번역은 뮈텔 주교의 계획에 따라서 1906년부터 착수되었다. 뮈텔 주교는 이 작업을 황해도 해주본당 주임으로 있던 한기근 신부와 황해도 봉산 검수(劍水)본당 주임으로 있는 손성재(孫聖財) 신부에게 맡겼다. 손성재 신부는 마태오 복음서를 번역했고 한기근 신부는 나머지 세 복음서와 역주작업을 진행하였다. 한기근 신부는 이 역주 작업과정에서 아마도 손성재 신부가 번역한 문장에 수정을 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성서의 속표지에 한기근 바오로 신부의 이름만 기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기근 신부는 경기도 양지에서 태어난 뒤 백부의 감화를 받아 1883년에 영세입교했다. 그 뒤 그는 1884년 신학생이 되어 말레이 반도 페낭에 있던 신학교에 유학을 하기도 했고, 1886년에 귀국하여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7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서품 직후 용산 신학교의 교수로 남아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02년에는 본당에 파견되었다. 그 이후 그는 저술과 번역작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는 1907년에 “예수진교사패”(야소진교四牌)를 지어서 개신교에 대하여 천주교를 옹호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고 성서 역주작업을 진행시켜서 1910년에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사성경”을 간행했다. 1911년에는 “성 분도 언행록”을 간행하여 교부관계 문서를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해 주었다. 그는 1914년 이후 “경향잡지”의 편집을 맡아보았다. 1922년에는 “종도행전”을 간행하여 신약성서 번역을 위한 계속적인 그의 노력을 드러냈다.

 

한기근은 한국 성서학 연구사를 정리할 때 특기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일종의 호교론자였다. 그가 지은 “예수진교사패”나 “경향잡지”에 실린 글들을 분석해 보면 이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 나라에서 교부학 연구사를 정리하는 데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다. 그는 한국 가톨릭 출판사(出版史)를 정리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이렇듯 그는 개항기 말엽과 식민지 시대 초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논객이었고 신학자였으며 지식인이었다.

 

 

맺음말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박해시대 이래로 성서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특히 미사 전례를 중시하던 당시 교회의 관습에 따라 미사 때 봉독되는 성서가 우선 번역 정리되었다. 이리하여 “성경직해”가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발췌본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성서를 본격적으로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다.

 

한기근 신부가 번역한 “사사성경”은 우리 나라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갖게 된 사 복음서의 완역본이다. 이 번역본은 헬라어 원문이 아닌 라틴어역 불가타본을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이정잡이 번역본이 아니다. 이 “사사성경”은 당시 이미 몇 종이 간행되어 있는 한글 성서 가운데 가장 정확한 번역으로 평가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기근 신부의 성서번역을 위한 노력은 그의 후배 성서학자들한테로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선종완(宣鐘完) 신부가 구약성서를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1977년에는 개신교와 공동으로 신구약 성서를 번역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이래로 간행되기 시작하여 오늘에까지 진행되고 있는 ‘200주년 성서’의 번역작업도 바로 이와 같은 성서번역의 전통을 강화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사사성경”의 번역과 간행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 교회의 학문적 치적 전통을 확인하는 데에 하나의 표석이 될 수 있다.

 

[경향잡지, 1995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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