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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우리 신앙의 해돋이 - 이승훈 관계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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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3

[신앙 유산] 우리 신앙의 해돋이 : 이승훈 관계 서한

 

 

시작하는 말

 

이른 아침 동쪽 바다에 나가 해돋이를 본 적이 있는가? 새벽 어스름이 걷히려 할 때 동녘의 바다는 용통 붉게 물들고 타는 듯한 물비늘이 바다에 일렁인다. 수평선 너머에서 머리를 디민 붉은 해는 문득 물 위에 떠서 찬연한 햇살을 뿌리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이 해돋이의 장엄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섬기기까지 하였나 보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교회가 새롭게 창설되어 가던 역사의 한 장면도 새벽 해돋이처럼 장엄하게 펼쳐졌다. 이땅에 새로운 사회와 질서를 세우려던 우리의 지성인들은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 많은 가톨릭 서적들을 스스로 구해 읽고 이를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2세기에 가까운 교리 연구와 비판을 거친 다음 우리 나라는 새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 한문본 교회 서적들이 한밤의 어둠을 깨려는 새벽녘의 여명처럼 그 빛을 더해 갔고, 드디어는 이땅의 사상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렇듯 우리 나라의 천주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 겨레의 자발적인 교리 연구로 창설되었다. 이 교회의 창설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새로 태어난 교회를 이끌어 갔다. 우리의 초창기 교회사에서는 이승훈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데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승훈의 업적을 전해 주는 역사적 자료 가운데에는 다섯 편의 ‘이승훈 관계 서한’이 있다. 이 서한들은 이승훈의 생애와 우리 나라 교회의 초창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전해 주고 있다.

 

 

서한의 구성

 

‘이승훈 관계 서한’은 모두 다섯 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승훈이 중국 북경의 북당(北堂)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보낸 두 통의 서한과 이승훈에게 보낸 유항검(柳恒儉, l756~1801)의 서한 한 편이 있다. 그리고 이승훈의 서한을 북당의 선교사에게 전해 준 윤유일(尹有一, 1760~1795)에 관한 두 편의 서한이 있다. 이 두 편의 서한은 당시 북경에서 선교하고 있던 판지(Joseph Panzi, 瀋廷瑋, 1733~c.1812) 수사와 로오(Nicolas Joseph Raux, 羅廣祥) 신부가 본국의 동료 회원들에게 각기 보고한 내용들이다.

 

여기에서 먼저 이승훈이 북경의 선교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훈은 1784년초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하기에 앞서 그의 영세 신부인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신부에게 해마다 소식을 전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귀국한 다음해에 그 동안의 소식을 전한 바가 있었다. 그 후 그는 1789년 동지사 편에 소식을 다시 전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펀지에 대한 회답을 받은 후 이승훈은 1790년 7월 11일자로 다시 펀지를 보내고 있다. 이 편지는 한문으로 쓰였을 것이나 현재 그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프랑스어 번역문이 로마의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유항검의 서한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유항검이 이승훈에게 보낸 서한은 1787년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지 수사의 서한은 1790년 11월 11일자로 작성되었으며 현재 예수회 본부의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판지 수사의 서한과 거의 같은 날 쓰여진 로오 신부의 서한은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이승훈 관계 서한들은 최석우 신부의 노력으로 1961년에 우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서한은 1989년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지만, 이를 좀더 가다듬어 정리한 자료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교회사연구” 제6집(1992년)에 수록되어 있다.

 

 

이승훈은 누구인가?

 

‘이승훈 관계 서한’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서한과 관계가 깊은 이승훈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 교회사 초창기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이승훈은 남인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평창(平昌) 이씨로서 그의 부친은 이동욱(李東郁)이었다. 그는 12세 때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학업을 닦으며 꿋꿋이 살았다.

 

나이가 차서 그는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 후 그는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여 선비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6경 중심의 선진(先泰) 유학에 전념하던 남인의 학풍에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 전래되어 청년 지식인들에게 적지 않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서양의 천문 지리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지사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1783년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李檗)은 이승훈에게 선교사를 만나서 천주교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오도록 부탁했다. 이승훈은 이 부탁대로 북경의 북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784년 3월경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살고 있던 이벽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이땅에도 새로운 교회가 출범되었다.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이땅의 문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시켜 갔다.

 

그는 거듭되는 박해의 과정에서 몇 차례 기교(棄敎)하기도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은 천주교 신앙을 조선에 전파시켰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창설과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만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가 세례를 받은 이후 179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교회사는 역동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우리 교회사가 전개되는 무대의 한가운데에서 기뻐하고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서한의 내용

 

이승훈은 첫 번째 서한에서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창설된 직후의 상황을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고하고 있다. 그는 이땅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졌음을 말하고, 이미 1천여 명의 신도들이 있음을 보고한다. 그리고 이벽과 김범우가 자신과 함께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85년의 박해로 말미암아 자신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김범우도 체포된 지 일년 뒤에 죽게 되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786년 봄 이후 신도들 스스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게 되었고, 그해 가을부터 미사도 집전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보고한다. 한편 그는 이와 같은 ‘가성직 제도’내지는 ‘가성무 집행’(假聖務執行)에 대해 유항검이 의문을 제시했음을 밝히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유권적 판단을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때 그는 자신의 펀지와 함께 유항검이 문제를 제기한 편지도 함께 동봉했다.

 

이에 대한 북경 주교의 답변은 물론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도들의 열의에 감복했고 그들의 선의를 인정해 주었다. 그 후 이승훈은 다시 윤유일을 북경으로 보내서 그곳의 선교사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발송했다. 이 편지에서 이승훈은 우선 선교사들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운 신도 공동체의 책임을 지기가 어려우므로 이를 면제시켜 줄 것을 청하며 성직자의 파견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승훈의 편지가 북경에 도착한 1790년을 전후한 시기로 북경 교회의 관심은 조선의 신생 교회에 집중되고 있었던 듯하다. 북경의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교회가 자생적으로 성립되었음을 경이의 눈으로 쳐다보았고, 이 기쁜 소식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구베아 주교의 조선 교회에 관한 서한이 작성될 수 있었다. 판지 수사나 로오 신부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판지 수사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였다. 그는 당시 북당에 거처하며 궁중 화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또한 로오 신부는 프랑스 출신 라자리스트 회원이었다. 이들은 이승훈의 서한을 휴대하고 북경에 온 윤유일을 만났다.

 

 

맺음말

 

우리의 역사가 근대를 향해 요동칠 때 그 힘찬 힘은 사상사의 분야에서도 드러난다. 그 대표적 예가 천주교 신앙의 실천이었다. 조선 후기의 민인들은 새로운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고 새 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이때의 천주교 신앙은 마치 아침의 해돋이처럼 이땅의 어둠을 밝혀 주었고 신분제의 압제에 찌들린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천주교에서는 뭇사람들에게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승훈 관계 서한’은 바로 우리 나라 천주교회가 시작되던 때의 여러 상황들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이 서한에서는 우리 나라 교회의 자생적 탄생과 최초의 박해 상황 그리고 가성직 제도의 성립과 폐지를 전해 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갓 태어난 교회를 이끌어 줄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청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담고 있는 이 서한은 당시의 상황을 알려 주는 일급 자료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정확한 정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94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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