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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거침없이 전개된 호교의 글 - 정하상의 상재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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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07

[신앙 유산] 거침없이 전개된 호교의 글 : 정하상의 상재상서

 

 

머리글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조선인 신도들은 이를 참다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믿고 실천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앙을 반(反)왕조적이며 반(反)윤리적 사상으로 파악하고 이를 엄격히 규제하고자 했다. 더욱이 1801년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진 이후로 정부에서는 천주교 신도들을 일종의 통외 분자(通外分子)로 규정하게 되었다. 외국과의 교섭권이 국가에게만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위정자들은 천주교 신도들이 국가의 정식 허가를 거치지 아니하고 외국인과 몰래 교섭하는 일을 반역 행위의 일종으로 파악해서 처벌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지속되던 과정에서 1839년에 이르러 대규모의 박해가 발생했다. 흔히 ‘기해 박해’라고도 불리우는 이 박해의 과정에서 조선에 나와서 선교하던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붙잡혀 순교했다. 그리고 정하상(丁夏祥), 유진길(兪進吉), 조신철(趙信喆) 등 조선인 신도들도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정하상은 ‘재상에게 올리는 글’[上宰相書]을 지어 교회를 변호하고자 했다. 그의 글은 박해 시대의 조선 교회에서 창출해 낸 짜임새 있는 호교의 글로 평가받고 있다.

 

 

정하상의 삶

 

‘재상에게 올리는 글’을 쓴 정하상의 한 삶은 이러하다.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楊根)의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정약종(丁若鍾)은 초기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였으며 “주교요지”를 지었던 뛰어난 이론가였다. 정약종은 1801년의 박해 때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丁哲祥)과 함께 순교했다. 아버지와 맏형이 순교한 1801년 당시 정하상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박해의 과정에서 그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한 살 아래 여동생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이들 가족들은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회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특히, 정하상은 조선 교회와 중국 교회의 연락을 위해 그리고 선교사를 맞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는 이를 위해서 중국의 북경까지 9회, 의주의 변문까지 11회나 왕래했다 한다. 그는 앵베르(Imbert)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의 입국에 안내자가 되었고, 이들을 맞아들여 보호해 주었다. ‘주교의 충실한 동반자’인 정하상은 주교가 입국한 이후 그로부터 신학을 배우며 스스로 성직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1839년 1월경부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탄압의 불길은 교회의 지도적 인물들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하상은 자신의 체포를 예견하고, 박해를 피해 도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이 옳고 바름을 떳떳이 밝히며 신앙의 자유를 옹호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의 호교문을 미리 작성해 놓았다. 그러다가 1839년 6월 1일 정하상은 어머니 및 여동생과 함께 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된 직후 자신의 이 글을 재상(宰相)에게 전달해 주기를 종사관(從事官)에게 부탁했다. 이 글이 바로 ‘재상에게 올리는 글’인 것이다.

 

 

‘상재상서’에 담긴 믿음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먼저 천주교의 교리를 풀어 밝히고 있다. 그는 천지 만물의 창조자가 있음을 말하고 인간에게 양지(良知) 즉 양심이 있음을 들어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또한 그는 ‘천주 십계’를 들어 천주교의 실천 윤리를 설명했다. 그는 천주교의 ‘십계’ 안에 유교의 삼강 오륜(三綱五倫)에 관한 모든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유교의 실천 윤리에 비해 천주교의 그것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그는 밝혀보려 했다.

 

또한 정하상은 천주교의 영혼관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영혼의 불멸과 상선 벌악의 당연함을 설명하며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 천당과 지옥을 논한다 하여 천주교가 불교의 한 갈래로 잘못 인식되던 당시의 지적 풍토를 배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천주교가 불교와는 다른 정도(正道)임을 밝히려 했다.

 

이렇게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통해 자신의 믿음이 올바름을 선언하고 있었다. 아울러 정하상은 이 글을 통해 우선 천주의 존재를 분명히 하려 했고, 천주교 실천 윤리의 우월성을 천명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선언은 당시의 지배층에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는데 대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정하상은 천주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내용들을 요약 정리하여 조선 정부의 관리들에게 제시해 주며 그들의 깨우침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았다.

 

 

거침없이 전개된 호교론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강력한 호교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먼저 천주교가 ‘무부 무군’ (無父無君)의 가르침이 아님을 밝히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 십계’의 제4 계명을 들어, 천주교가 부모와 국왕올 깍듯이 받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정하상은 부모나 국왕에 대한 충효(忠孝)에 앞서 하느님 천주께 대한 충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세속적 충효를 온전히 부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국왕과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던 충효를 상대화시켰던 것이다.

 

정하상은 천주교가 중국 밖에서 전래되었기 때문에 이적 금수의 학문이라는 비난에 반대하고 있다. 그는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형성된 학문이라 하더라도 진리이면 받아들여야 함을 다음과 갈이 말했다. “외국의 도라 하여 금한다는 말이 있사온데, 다시 비유로써 말씀드리리이다. 금(金)이라는 것은 그것이 나온 땅으로써 택함이 아니라, 오직 그 깨끗함을 곧 보배로 치나이다. 도라 하는 것도 지방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도이든 도만 바르면 참도가 되는 것이옵니다. 어찌 참된 도가 나라와 지방을 가리겠나이까?”

 

이 밖에도 정하상은 이 글을 통해서 천주교 신도들이 재물과 여색을 공유한다는 이른바 통화 통색론(通貨通色論)에 대하여 저항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재물을 통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여색을 통한다는 비난에는 전혀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자 했다. 또한 그는 조상 제사와 신주 모시는 일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주장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간절히 요청 했다.

 

 

마무리

 

정하상이 지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은 한문으로 3400여 자에 이르는 비교적 간단한 문헌이다. 정하상은 이 제한된 글을 통해 교회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함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논리 정연하게 작성된 이 호교의 글은 초기 교회의 정신사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글을 지은 정하상은 1839년 8월 16일 서소문 네거리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도 그의 뒤를 이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이들이 걸은 순교의 길은 성인(聖人)에로의 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 ‘상재상서’는 참다움을 사랑하며 참답게 살아가려던 한 사람의 굳은 의지가 깃든 글이다. 여기에는 전환기를 살면서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던 한 가톨릭 지식인의 예지와 정열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순교자의 용기와 성인의 믿음이 스며 있는 우리의 성전(聖傳)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0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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