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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24: 예로니모와 불가타 성서 - 읽기 쉽게 라틴어로 성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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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15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24) 예로니모와 불가따 성서 - 대중이 읽기 쉽게 라틴어로 성서 번역

 

 

- 베들레헴의 가타리나 성당. 해마다 여기서 전세계로 방영되는 성탄자정미사가 봉헌되는데 성당에서 지하계단으로 내려가면 예로니모 성인의 서재가 있다.

 

 

[베들레헴=김상재 기자] 얼마전 TV에서 고전강의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도올 김용옥은 예수님의 탄생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해산일이 임박한 임산부가 나자렛에서 300여리 떨어진 베들레헴으로 이동해 아이를 낳은 것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신약학계에서는 이미 친숙한 추론이다. 예수 부활이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신봉했는데 베들레헴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가 아니란 반론이 제기 될 것이 분명하기에 복음사가들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호구조사까지 만들어 내면서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실제로 탄생한 곳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섬긴 믿음에서 나온 신앙적 탄생지라는 것이 역사비평학적 성서학자들의 견해다. 물론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지로 베들레헴을 보는 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냐 나자렛이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베들레헴이 예수님의 탄생지라는 것이 교회 내에서 오래된 전승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오늘날에도 성탄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베들레헴의 성탄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324년 베들레헴에 순례와서 예수님 탄생지로 전해오는 동굴을 참배하고 그 동굴 위에다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당은 언젠가 불타버리고 지금은 유스티아누스 황제때 완공된 것이다.

 

이 유스티아누스 성당 왼편에 1881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세운 가타리나 성당이 있다. 전세계에 방영되는 성탄자정미사는 여기서 이뤄지는 것이다. 가타리나 성당에서 지하계단으로 내려가면 예수탄생 동굴과 비슷한 동굴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예로니모 성인의 서재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곳에서 34년간 집필하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예로니모는 420년에 선종했는데 생시에 서재 근처 동굴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서재 옆 동굴에 묻혔으나 13세기에 이르러 성인의 시신은 로마 성모대성당으로 이장됐고 지금은 빈 석관만이 남아있다.

 

 

예로니모

 

뛰어난 성서학자이며 수덕가로서 서방교회의 4대 교부중 한 명인 예로니모 성인은 347년 현재의 유고슬라비아인 달마시아의 스티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로마에 가서 수사학과 치체로 등의 라틴고전문학을 배웠고 19세때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의 트리어 지방에서 관리로 일하다 아리우스 이단논쟁으로 트리어에서 귀양살이(335~337)하던 아타나시우스 성인에 의해 소개된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에 매료되어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373년 친구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열병에 걸려 친구는 죽고 자신은 회복되어 안티오키아에 머물며 성서주석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운 예로니모는 이때의 체험으로 성서연구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에 예로니모는 성서를 로마제일의 변호사로서 뛰어난 문체를 자랑하던 치체로의 작품과 비교하여 조잡한 문장에 의한 보잘 것 없는 저서로 여기고 있었다.

 

그후 그는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에서 3년동안 은수자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후 성서주해 연구에 나섰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서 아리우스 이단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오자 379년 안티오키아로 가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콘스탄티노플로 가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강의를 듣고 오리제네스 성서주석에 심취해 이때부터 오리제네스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예로니모는 382년 교황 다마소 1세의 초청으로 로마로와 3년간 교황비서로 봉직하면서 교황으로부터 라틴어성서번역을 의뢰받았다. 이에 수년간의 노력 끝에 유명한 불가따 성서번역본을 완성했다.

 

고령이던 교황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예로니모는 엄격한 수덕가로서 해이한 생활을 하던 성직자들을 비난하여 동료 성직자들로부터 신임을 얻지못하고 교황 서거후 적대자들의 비난이 심해지자 로마를 떠나 386년 여름부터 420년 선종할때까지 베들레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저술과 번역활동에 몰두했다. 

예로니모는 라틴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학자로 엄청난 분량의 저서를 남겼으며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불가따 성서

 

그러나 무엇보다 예로니모는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이사야 주해서 서문)는 자신의 말에서 보듯 성서학자였고 그의 불가따본 성서번역본은 교회에 공헌한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다.

 

2세기 중엽부터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성서는 4세기 말경에 이르러 라틴어 필사본들이 양산되자 그 순수성의 훼손이 심각할 정도였다. 그러자 라틴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있던 성서의 개정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를 맡은 것이 고대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성서학자 예로니모 성인이었다.

 

구약성서의 경우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던 예로니모는 성서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구약성서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신약성서는 그리스어에서 직접 번역하게 된다.

 

예로니모는 382년 교황 다마소 1세의 명을 받은 이후 복음서는 384년에, 신약 전체는 386년에, 구약은 404년에 완성했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따(Vulgata)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3세기 경이었는데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인수페르(Insuper)라는 칙령을 통해 교회 공식성서로 선언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원천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예로니모의 원칙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요구되는 덕목일 것이다. 죄가 되는지 안 되는 지만을 따지기 보다 그리스도의 삶에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를 먼저 찾는 일이 더 중하고 그 잣대의 기준은 성서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예로니모가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셔진 것은 교회 가르침과 교회생활의 기본은 성서라는 것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2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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