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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배교자가 걸은 순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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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5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배교자가 걸은 순교의 길

 

 

박해시대 교회사에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탄압 때 관헌에 체포되어 배교를 선언했던 신도들이 여럿 확인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배교를 곧 포기하고 다시 신앙을 선언하며 순교의 길로 들어섰다. 죽기를 각오했다면, 왜 신문과정에서 배교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왜 또다시 신앙을 고백하여 순교의 길을 걸었는가? 그들은 삶과 죽음과 믿음을 어찌 생각했는가? 박해시대 ‘배교자가 걸었던 순교의 길’을 이해함으로써 박해 당시의 신도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사람의 윤리와 하느님의 가르침 우리 나라의 전통적 사회에서는 삼강오륜으로 집약된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삼강오륜은 인간 세계 안의 질서를 규정하는 윤리였다. 거기에는 초월적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천주학쟁이들은 인간 윤리가 가지고 있는 신적 기원을 터득했다. 그들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부모에 대한 효도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등급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면, 1801년에 순교한 현계완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계셨다. 그는 아버지께 효도하도록 배교하고 살아나기를 강요받았지만 효도에는 ‘가볍고 무거운 구별이’ 있다며 더 중요한 하느님께 대한 효도를 택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신앙의 포기를 요구하며 가해지던 무서운 고문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그 고문에는 ‘무지몽매한’ 천주학쟁이를 배교시켜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신문관들의 ‘인정’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고문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법으로 금지되었던 주리와 같은 악형이 공공연히 시행되기도 했다. 1801년 김유산은 정강이뼈를 휘어 탈골시키는 형벌을 받았다.

 

고문에 무너져 배교의 길을 택했던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제정신이 들자 다시 신앙을 ‘고집’하기도 했다. 장덕유는 고문을 당하자 예수를 ‘개나 돼지’ 같은 자식이라며 배교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려 “교주를 배반한 죄는 후회막급이다.”며 신앙을 되찾았다. 이처럼 배교했다가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은 사람의 윤리보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더욱 존중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배교자의 신앙고백 1801년에 순교한 인물 가운데 변득중이란 사람이 있다. 서울 대묘동에 살던 그는 본시 양반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던 양인이었다. 그의 세례명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는 1785년 김범우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전수받았다. 그 해에 김범우는 형조에 잡혀가서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을 갔지만, 변득중은 서울에서 눌러 지내며 천주교 신자들과 연결을 맺고 있었다.

 

그는 최창현에게서 계속해서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이때 그는 천주교 신앙에 근실하기가 어려워 여러 차례 십계를 범했다고 고백했다. 시원찮은 신앙생활 때문에 신자들도 그를 잘 끼워주지 않았다고 한다. 1795년에는 이합규, 장덕유와 같은 중인이나 양인 신분층의 신자들과 다시 어울려 다녔다. 이때 그는 교회의 지도자였던 황사영을 만났다. 비밀리에 선교하고 있던 주문모 신부도 만나보았다.

 

그러나 1801년 초부터 박해의 회오리가 몰아치자 그는 3월 중순께에는 자신의 집을 팔고 성밖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관헌에게 발각되자 살길을 찾아 재빨리 배교했다. 그리고 관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던 황사영을 잡아 바치겠다고 장담했다. 그는 함께 체포되어 배교했던 장덕유와 함께 황사영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눈에 띄는 신자들을 관가에 고발해 잡혀가게 했지만, 황사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배교한 뒤 그는 신자들을 염탐하는 정보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 말종으로 전락한 그는 신자들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입교하던 당시의 첫마음으로 돌아가 신앙을 고백하며 죄를 통회했다. 그리고 천주교 서적을 배워서 이를 정도(正道)로 알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죽더라도 천주교를 배반할 뜻이 없다고 했다. 장덕유도 자신의 신앙을 다시 회복했고, 이로써 그들은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 어머니의 배교와 순교 이성례 마리아를 아는가? 그는 순교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여섯 아이의 어미였다. 마카오로 유학 간 최양업 밑에는 열두 살 된 야고보와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 된 아이들이 있었다. 1839년 기해년에 최경환과 이성례는 과천 수리산 뒤듬이 교우촌에서 함께 체포되었다. 감옥 안에서 몇 개월 지내는 동안 이성례는 영양부족으로 젖길이 막혔다. 그의 젖먹이 막내아들 스테파노는 감옥에서 굶어죽었다.

 

남편인 최경환은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성례도 300여 대 곤장을 맞았지만 신앙을 계속해서 고백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스런 아이들이 늘 눈에 밟혔다. 이성례는 의지가지없이 남게 될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여 애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영혼이 위험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함으로써 어머니 구실을 해보고자 했다. 당시 그에게 어린애들은 자신의 하느님이었고 미래였다.

 

그러나 이성례는 교회 창설 당시부터 하느님 신앙에 접했던 집안 출신이었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최경환에게 시집온 뒤 철저히 신앙을 실천했다. 그에게는 특별한 존재인 자식에 대한 모성애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비교하며, 그 사랑의 경중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배교를 취소하고, 감옥을 찾아온 아이들에게 말했다.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라.” 이로써 그는 여느 인간의 길이 아닌 성인의 길을 택했다. 이성례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원효로 부근의 당고개에서 다른 열한 명의 순교자와 함께 목이 잘렸다. 그는 시성되지 않았지만 우리 마음 안의 성인이 되었다.

 

순교자가 된 그들 우리는 박해시대 배교의 원인으로 몇 가지를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잔혹한 고문에 굴복한 배교도 있었다. 누구는 세상의 인간적 윤리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리를 끊지 못해 신앙을 포기하기도 했다. 교회에서 경제적 이득이나 현세 구복의 목적으로 입교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기대치가 충족되지 않자 “예수는 개나 돼지다.”라며 미련없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배교의 길을 택했다가 다시 순교하기로 다짐했던 여러 사람들을 교회사에서 만나게 된다. 이를 보고 당시의 지배층은 “시랑이 같은 성질은 교화되기 어렵고, 올빼미 같은 마음보는 바뀌지 않는다.”며 치를 떨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들에게서 인간성의 궁극적 승리를 읽을 수 있다.

 

이성례의 아들 열두 살 된 야고보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역경은 그 어린애를 철들게 했다. 그는 희광이를 찾아가 구걸한 돈푼을 전해주면서 어머니의 목을 단칼에 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신앙을 생각하면서 동생들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그 믿음을 통해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알았고, 존엄한 인간으로 떳떳이 존재하게 되었다. 순교자 어머니의 바람대로….

 

[경향잡지, 2001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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