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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교회 언론의 현실과 과제: 교회신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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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30

교회 언론의 현실과 과제


- 교회 신문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는 말

 

교회 언론에 몸담고 있는 현직 기자 신분으로서, 필자가 끊임없이 반성해 왔던 물음 가운데 하나는 ‘교회 언론의 기능은 무엇이며, 현재 교회 언론은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물음을 화두로 삼아 개인적으로 또는 동료 기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다듬어 왔다. 마침 ‘교회 언론의 실태와 전망’을 주제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고, 그 동안 생각해 오던 바를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 응하기로 했다. 따라서 이 글은 교회 언론에 대한 논리 정연한 이론을 펴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자의 소박한 체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 될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또한 필자는 교회 신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어서, 교회 언론의 범위를 교회 신문으로 국한하여 이야기를 풀어 가고자 한다.

 

 

2. 교회 언론의 기능과 사명

 

1) 언론의 기능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보도 기능과 여론 형성의 기능을 들 수 있다. 보도 기능이란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으로 사회의 여러 현상과 소식들을 관찰하여 보도하는 것을 말한다. 언론의 보도에서 독자들은 직접 체험할 수 없는 다양한 정보와 소식들을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필요에 따라 어떤 구체적인 판단이나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론 형성의 기능은 이 보도 기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언론은 현상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논평하고 해설하고 분석하는 기사로써 독자들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깊이 이해하도록 도와 주며, 폭 넓은 의견 교환의 장을 마련해 줌으로써 건전하고 발전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계도해 나간다. 

 

사회 공동선의 증진과 사회 정의의 구현, 보편적인 인간애의 실현 등을 사명으로 하는 언론의 이 같은 기능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인 전달로 이해되지 않는다. 전달하는 측과 전달받는 측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상호 작용을 할 때 비로소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언론이 한 지역 사회나 국가 사회 또는 세계 공동체 안에서 이 같은 소통자의 역할을 한다면, 교회 언론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마찬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교회 언론’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교회 언론, 구체적으로 교회 신문인 [평화신문]이나 [가톨릭신문]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여러 질문들은 직간접적으로 이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2) [평화신문]이나 [가톨릭신문]은 교회가 운영 주체가 되어 발행하는 신문으로, 복음 선교 또는 복음화를 주 발행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독자들이 선교의 일차적인 대상인 ‘비신자’가 아니라 이미 복음화가 되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을 이루고 있는 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이율 배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가 주 목적이라면 [평화신문]이나 [가톨릭신문]은 비가톨릭 신자들, 적어도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 신문들이 다루는 내용들도 마땅히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톨릭신문]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거의가 교회에 관한 것들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톨릭신문]과 차별화한다고 하는 [평화신문] 역시 그다지 나을 게 없다. 

 

그런데도 왜 교회는 ‘복음화’를 기치로 내걸고 현재와 같은 신문을 발행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복음화’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19항)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복음화는 단지 비신자들을 신자로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과 이들이 이루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복음의 정신으로 더욱 충만해지도록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많이 강조하고 있는 ‘새로운 복음화’ 또는 ‘재복음화’다. 

 

교회가 현재와 같은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두 신문이 겨냥하는 독자층이 신자들이고, 취급하는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공동체의 삶에 관한 것들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교회 신문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비판적인 지적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이 같은 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 교회 신문과 관련하여 나오고 있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교회 기관지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교회 신문은 교회 기관지여야 한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러나 이 말은 [평화신문]은 서울대교구의 기관지여야 하고, [가톨릭신문]은 대구대교구의 기관지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좀더 근원적으로, 교회가 복음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발행하는 신문이기 때문에 교회의 기관지일 수밖에 없고, 또 교회 기관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관지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그 기관의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올바로 알리는 일이다. 따라서 교회 기관지인 교회 신문은 교회의 가르침을 빠르고 알기 쉽게, 더욱 많은 하느님 백성에게 알려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교계 제도를 통해서 전달된다. 보편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교황과 그 협력자들인 주교를 통해서, 그리고 주교단을 통해서 일선 사목자와 신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특히 주교는 개별 교회의 교도권자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고 수호하는 권한과 책임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개별 교구가 발행하는 교회 신문은 보편 교회의 기관지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해당 교구의 기관지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신문이 안고 있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평화신문]이나 [가톨릭신문]은 그 발행 주체가 되는 교구민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전국의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다.

 

 

3. 교회 신문의 현실

 

1) 교회 신문이 기관지라고 해서 언론의 기능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언론이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언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벽에 못을 박으려는 사람이 솜뭉치를 가지고서는 결코 못을 박을 수 없다. 못은 망치나 기타 단단한 물체로 두들겨야만 제대로 벽에 박을 수 있다. 이것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어떤 수단을 활용하려 할 때는 그 수단이 지니는 효율성을 살리기 위해 고유한 기능들을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복음 선교를 위해 언론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언론이 지니는 고유한 기능을 충분히 존중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굳이 신문이라는 언론 매체를 발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주보나 잡지 또는 다른 필요한 매체들을 활용하면 될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교회 신문들이 지니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언론이 지니는 본질적인 기능, 곧 소통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크게 미흡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그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두 가지 요건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한다. 편집권의 독립과 취재, 보도의 자유가 그것이다. 

 

2) 복음 선교를 사명으로 하는 교회가 언론을 활용한다는 것은 복음의 메시지라는 내용물을 언론이라는 그릇(수단)에 잘 담아서 독자들이 받아먹기 쉽도록 해 준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약 20년 전, 한국에서 오랜 동안 생활했던 한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 교회의 홍보 매체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논문을 썼다. 이 선교사가 당시 한국 교회의 현실을 언급한 내용을 간추려 보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 교회의 상황은 양분되어 있다. 한쪽에는 복음의 메시지라는 내용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집단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쪽에는 메시지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그릇을 잘 만들어 내는 데 정통한 이들이 있다. 다양한 홍보 매체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다. 문제는 메시지에 정통한 이들은 그릇을 잘 모르고 있고, 그릇에 정통한 이들은 메시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전 외국 선교사가 관찰한 이런 측면이 오늘의 교회 언론에도 거의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결코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지만 필자는 교회의 고위 장상들을 만나면 때때로 ‘교회 감각’이 없다는 지적을 듣는다. ‘교회 감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 감각’이라는 말이 단순히 호교론적인 차원에 그치거나 교회 장상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어떻게 보면 [평화신문]이 초창기에 겪었던 파동이 바로 ‘교회 감각’과 관련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교회 신문에서 ‘편집권의 독립’은 이 ‘교회 감각’(sensus ecclesiae)과 깊이 결부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 감각은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결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교회 감각은 살아 움직이는 교회 공동체와 함께할 때만이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전한 교회 감각 또는 ‘신앙 감각’(sensus fidei)이 바탕이 되어 있을 때만 참으로 교회적인 시각으로 현상을 진단할 수 있고 복음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권의 독립은 교회 신문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신문은 교회 언론이라는 이름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편집권의 독립을 위해서는, 교회 신문은 건전한 교회 감각 또는 신앙 감각을 체득해야 한다. 교회 신문에 편집권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거기에는 이런 부족한 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3) 앞에서 언론의 본질적인 기능이 소통에 있으며, 참다운 소통은 일방적이지 않음을 언급했다. 그런데 현재 교회 신문의 기능은 참다운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인 전달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 언론을 아끼는 사람들이 ‘교회에도 언론이 있느냐’는 비판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은 교회 언론이 소통자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론이 올바로 조성되어야 한다. 미국 보스턴 대교구장인 리차드 쿠싱 추기경은 이미 지난 1963년에 “교회와 여론”이라는 제목의 사목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여론을 교회 안에 있는 신도들이 갖고 있는 신념과 태도, 판단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성령의 일상적 활동의 표현인 이 같은 의견은 교회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의 진리를 명백하게 한다. 이것은 생활과 활동 면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더욱 충분히, 그리고 더욱 정확하게 적용되기를 요구하는 그 시대의 생활과 활동에 관계되는 의견의 발표를 포함한다. 그 밖에 어느 시대나 인간의 약점을 통해서 교회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남용에 대한 반발을 여론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여론이란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해 언급하는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 개인의 의견을 모으는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가견적 힘이다.”([사목] 10호(1969.8.), 87면) 

 

문제는 오늘의 교회 언론이 일방적인 전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교회 내 여론을 조성하고 진정한 소통자 역할을 하는 데 대단히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그 주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취재, 보도의 어려움이라고 본다. 25년 전 [가톨릭시보](현재의 [가톨릭신문]) 주간이었던 김경환 몬시뇰은 취재, 보도의 어려움을 이같이 털어 놓았다. 

 

“ …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조금이라도 개인적 감정을 건드리기만 했다면, 그 반발이 즉각 대단하게 나타난다. 언론이 갖고 있는 대의적인 면은 아랑곳없고, 그저 나에게 대한 기사가 어떻게 나오는가, 나를 어떻게 비판하는가에만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마치 감정 대립의 정글 속에 들어가서 길을 파헤쳐 나가는 그러한 심정으로 신문업에 임해야 하는 것이 교회 내의 언론의 실정이다. 그리고 교회 내의 언론은 모두 교회 기관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 자체를 비판하고 교회의 이해를 손상케 할 수 있는 기사는 취급이 대단히 곤란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잘못된 일이 있어도 교회 내의 것이라면 보도를 삼가해야 하고 다만 교회의 선전, 찬양이 주가 되어야 한다. … 그래서 교회 내의 언론 자유란 교회를 위한 적극적인 자유밖에 없다.”([사목] 28호(1973.7.), 15-16면) 

 

이 글에 참고하려고 [사목]의 관련 원고들을 찾아보다가 김경환 몬시뇰의 글을 발견한 필자는 취재 보도의 어려움에 대해 달리 글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 몬시뇰의 글은 25년 전이 아닌 오늘의 현실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면으로는 25년 전에 비해 더 많은 취재, 보도의 자유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만이 아니라 교회 언론에 몸담고 있는 다른 동료 기자들조차도 거의가 한결같이 김 몬시뇰이 지적한 것과 같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교회는 “여론이 제대로 형성되려면 우선 정보의 원천과 통로에 접근할 수 있고, 자신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자유가 사회 안에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일치와 발전, 33항)고 가르치고 있다. 또 “알 권리에는 정보를 찾아낼 의무가 따른다.”(일치와 발전, 34항)고도 가르친다. 따라서 교회 언론이 여론을 제대로 조성하거나 반영하지 못하고 소통자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원인을 취재 보도의 어려움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거기에는 현장을 열심히 뛰어 제대로 취재하고 기사화하지 못하는 기자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잘못의 무게를 저울에 놓고 달아본다면 어느쪽으로 기울 것인가.

 

 

4. 교회 언론의 과제

 

1)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교회 신문들이 참으로 교회 언론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매체 종사자들이나 매체 환경(취재원을 비롯해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이 언급한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것이 곧 교회 언론의 과제가 될 것이다. 

 

첫째는 언론 종사자들의 과제다. 언론 종사자들은 교회 언론이 지니는 고유한 성격에 따른 자질과 역량을 갖추는 일이 시급하다. 이것은 단순히 일반 기자의 자질과 역량뿐 아니라 올바른 교회 감각을 가진 ‘교회의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전문적인 식견과 역량을 갖추는 일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야만 교회적인 눈으로 다양한 사건의 현상과 그 이면을 바로 보고 제대로 식별하여 독자들에게 올바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 언론사들은 그 종사자들을 위한 교육과 투자에 더욱더 관심을 갖고 배려해야 하리라고 본다. 

 

둘째는 취재원 또는 뉴스원들의 과제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취재원들은 기자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 언론을 단순히 자기들의 선전 도구로만 활용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취재원들이 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것이고 교회 언론의 역할도 그와 같은 것이라면, 기자들이 정보의 원천과 그 배경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들의 일을 교회 공동체의 여론에서 검증을 받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수용자들의 과제다. 수용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교회 언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요청된다.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거부하거나 외면한다면, 교회 언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다. 때로는 따끔한 질책으로, 때로는 칭찬과 성원으로, 교회 언론이 교회 공동체의 쇄신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더욱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란다.

 

2) 교회는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 공동체 자체의 발전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간화와 복음화를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 언론의 역할은 교회 공동체 안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듯이, 교회 언론도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지난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교구가 소유했던 [경향신문]이나 현재 대구대교구가 소유하고 있는 [매일신문]의 발행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또 발행 초기의 [평화신문]을 생각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의 [평화신문]에 대해서도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적 투자와 함께 전문성을 지닌 많은 인력의 확보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냉혹한 시장 경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언론 시장에서 제대로 살아 남을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교회 언론의 현실에서 본다면,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하고 있는 아기에게 달리기를 하라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언론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사회에 대하여 특히 생명, 인권, 윤리, 도덕, 환경 등의 문제에서,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는 예언자적 역할을 그때그때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일정한 기여를 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5. 맺음말

 

흔히 언론을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 언론은 교회 공동체의 거울이다. 교회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면, 역설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 언론이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 언론 종사자들의 각성과 함께 평신도와 수도자, 성직자 등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땅의 하느님 백성 모두의 이해와 관심, 사랑과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목, 1998년 12월호, 이창훈(평화신문 취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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