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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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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6 ㅣ No.902

[경향 돋보기 - 너희는 오직 정의만 따라야 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요즘 우리 한국사회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목으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텔레비전에서도 ‘대한민국에 정의를 묻다’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된다. 교회도 사회교리주간을 제정하고 교구마다 사회교리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성숙한 결과라기보다는 사회의 양극화와 불의가 심해져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 같아 무턱대고 반갑지만은 않다.

경향잡지의 이번 호 기획은 정의에 관한 세 편의 글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불공정하고 불의한 모습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매우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다. 학술적인 전문가도 아니고 이른바 ‘운동가’도 아닌, 오히려 보고 들어 아는 게 생겨도 애써 무관심하고 싶어하던, ‘소시민’에 가까운 내가 과연 무얼 쓸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글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참된 신앙인으로, 또 책임 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 사회와 우리 자신, 그리고 의로움에 대한 성찰을 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이 글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많은 이들에 대한 초대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 정의를 묻다

우선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작해 보자. ‘SBS 스페셜’에서 2부로 방영한 ‘대한민국에 정의를 묻다’라는 다큐는 제목 그대로 대한민국의 정의 현실을 여러 각도에서 다루면서 그 배경이 되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면을 같이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설문 통계에서 한국사회가 정의롭다고, 또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단 5%에 불과했다. 우리가 체감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다큐는 우리 사회의 공정하지 못한 면을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그중 하나가 조직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의에 관한 이야기다. 잘 알려진 내부고발의 사례로 전직 해군 소령 김영수 씨가 있다. 그는 업무를 통해 10억 원가량의 군납비리를 알게 되었다. 정의감에 불타서가 아니라 범죄자가 되기 싫어서 그는 이 비리를 계통을 밟아 보고하였다. 부대에서 처리가 되지 않아 헌병대로, 거기서도 반응이 없어 국방부로…, 결국 그는 비리를 고발하여 바로잡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훈장을 받았지만 해군은 그가 조직에 해를 끼쳤다며 불명예제대를 시켰다.

조직의 범죄에 가담하지 않고 양심을 따라 행동한 것을 조직에 해를 끼친 행위라고 본다면 해군이라는 조직의 실제 목적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부정한 이득을 분배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가 막히는 것은 이 모든 내용이 비밀이 아니라 언론에도, 정치권에도, 훈장을 준 대통령에게도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불공정 인사가 문제시되지 않고 덮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그 밖에도 맷값을 주고 노동자를 폭행한 재벌 이야기, 비윤리적 경영으로 도산한 저축은행의 VIP들이 자기 돈을 인출하는 동안에도 서민들에게는 계속 예금을 권유해야 했던 직원들의 이야기, 재벌에게 사기당한 중소기업 사장의 고소를 기소조차 하지 않는 검찰의 이야기, 자식들에게까지 신의 직장을 물려주는 공기업의 이야기 등 우리가 모르지 않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들이 모두, 다양하지만 한결같은 우리 사회의 불의에 대한 보고이다. 하나같이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부당하게 그들의 것을 빼앗는 이야기다.


사회 불의의 구조적 성격

어느 누구도 이것이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대다수는 이런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현실이 바로잡히기는커녕 더 심해진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이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토록 불의가 만연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중요한 질문이다.

정의를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정당하게 배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불의는 ‘내 것이 아닌 것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선량한 사람으로서, 내 것이 아닌 것을 부당하게 취하지도 않고 정당한 나의 몫을 빼앗기지도 않는 삶을 원한다. 그런데 내가 사는 사회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곧 남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지 않으면 나의 것마저도 빼앗기도록 사회 규칙이 만들어져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김영수 소령은 불의에 가담하지 않기를 원했을 뿐이었는데, 그러려면 자신의 직위와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빼앗겨야만 했다. 이것이 이른바 ‘구조적’ 문제이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내가 나의 양심을 따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불의를 당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남에게 불의를 행할 것인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불편한 진실 : 불의한 선택

다큐는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불의를 당하기보다는 불의를 행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진단할 수 있다.

첫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아이가 해외 연수의 기회가 걸린 중요한 시험을 치렀는데, 한 문제 차이로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답안지를 보니 맞은 답이 틀린 것으로 잘못 채점된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항의를 하여 이를 바로잡겠는가? 아마 대다수가 항의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을 보자. 같은 시험에서 당신의 아이는 턱걸이로 합격을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틀린 답이 맞은 것으로 잘못 채점된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이를 바로잡겠는가? 아마 많은 이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또는 누구나 실수는 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갈 것이다.

다른 질문도 있다. 당신이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을 찾았는데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당신보다 늦게 온 환자가 응급실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 당신보다 먼저 치료를 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신은 항의를 하겠는가? 이것이 첫째 질문이다. 답은 각자가 생각해 보자. 다음 질문은 당신이 응급실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친한 친구가 연락을 해서 어머니가 갑자기 아프셔서 응급실에 모시고 가는데 편의를 좀 봐달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불의한 사회의 악순환

무엇이 우리에게 불의한 선택을 하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양심을 잠시 눈감게 하는가?

그 하나는 우리의 양심적 선택에 너무 큰 것이 걸려있는 경우이다. 우리 사회는 성적에 목매고 있는 사회다. 초등학생이 성적 때문에 자살을 하도록 아이들을 내모는 사회이다. 성적을 통한 경쟁이 이토록 치열하지 않다면 양심의 선택에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돈에 대해서도, 권력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무척이나 치열하다. 그러다보니 수단과 양심을 가릴 여유가 부족하다. 반칙에 대한 가책에 무뎌진다.

또 하나, 우리가 스스로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불공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곧, 다들 수단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서는 ‘자기 것을 못 챙기는 사람이 바보’라는 태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불의한 사회의 잠정적인, 또는 현실적인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잠정적이고 현실적인 가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가진 사람도 안심할 수가 없다. 조금만 마음을 놓으면 내가 가진 것을 언제 뺏길지 모르는 것이다.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을 보호하려고 가진 것을 사용해야 하고, 더 가질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가진 모든 것, 부와 권력과 인맥과 그 밖의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불공정한 먹이사슬에서 먹히기보다 먹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공정한 경쟁을 기대할 수 없다. 더 가진 자는 덜 가진 자와의 격차를 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불의한 구조를 고치기보다는 더 심화하려고 한다.

최근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갑들이 을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챙기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갑은 더 당당해지고 을은 더 비굴해진다. 모든 이가 갑이되기를, 그것도 늘 갑으로만 남을 수 있는 슈퍼-갑이 되기를 바란다. 금전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쥔 사람과 손을 잡고, 언론이나 학계나 종교계나 무언가를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자기 기득권을 보호하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이것이 불의한 사회의 악순환인 것이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세례를 주며 회개하라고 가르치자 사람들은 요한에게 묻는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요한은 세리들과 군인들과 군중의 질문에, 정해진 만큼만 받으라고, 자기가 받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가진 것을 가난한 이와 나누라고 대답한다.

받을 만큼만 받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사회는 ‘받을 만큼만’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있는 만큼’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욕심과 양심의 싸움이 아니다. 모두가 납득하고 만족할 만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기준을 함께 만들고 지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의 불의는, 첫째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 사실이다. 정당하게 받을 자신의 몫에 만족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다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필요한 만큼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나눔도 필요하다. 그리고 나에게 피해가 오더라도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 불의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용기’도 필요하다. 각자의 양심에 따르는 개인들의 노력이 없다면 이 사회는 결코 변화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노력을 뒷받침하는 구조적 정의가 또한 마련되어야 한다. 힘있는 자, 가진 자에게 유리한 제도는 세상을 각박하게 만들고 불의를 조장한다. 힘없는 사람도 노력하면 인간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 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은 힘없는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가진 자들도 불의하고 각박한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의 바탕은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노동자, 이민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도 노력하면 인간답게 존중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제도이다. 그러려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사회 구조를 바꾸고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사람들, 부유하고 힘있고 발언권이 있는 사람들, 곧 부자,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변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응급실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어떤 이들은 가진 자들을 위해 비싼 병원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이 올 수 없는 한가하고 쾌적한 응급실이 있으면 부자들은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애초부터 모든 이가 같은 조건으로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면 된다.” 라고.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응급의료체계를 합리화하여 급하고 위중한 환자가 더 먼저, 더 좋은 시설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면 현재의 시설에서 더 많은 사람이 만족하고 안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응급상황에서 불안해하며 인맥을 동원하는 ‘불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나라에서 잘 가동되고 있는 이런 제도를 우리나라에서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의 지도층들이 사회적 격차를 벌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함으로써만 그들 개인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집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욕심에 굶주리고, 구조적으로는 기득권의 유지에 목말라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행하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해서는 흡족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며, 내가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이들을 돕고 보호하는 사회를 건설하려고 나설 때에만, 비로소 흡족함을 체험할 것이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 변승식 요한 보스코 - 의정부교구 신부. 현재 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변승식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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