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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0: 비잔틴 교회 - 국가에 종속된 교회 모습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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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1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0) 비잔틴 교회 - 국가에 종속된 교회 모습 보여

 

 

-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에우독시아가 자신에게 직언을 일삼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에게 귀양을 통고하고 있는 장면.

 

 

[이스탄불=김상재 기자] 교회가 걸어온 지난 흔적들을 찾아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소아시아라 불리는 아나톨리아 지방이었다.

 

로마제국의 주무대였으며 이전에 이집트의 가장 위대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자웅을 겨룬 히타이트의 땅.

 

뿐만 아니라 바울로 사도 전도여행지의 주무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전파의 관문역할을 해냈던 곳.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 1차부터 8차까지의 공의회가 열려 그리스도교 교리가 체계화되고 다듬어진 곳이다.

 

이처럼 100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로 찬란한 그리스도교 문명을 꽃피웠던 신앙의 땅이면서도 터어키하면 신앙과의 연관성이 빨리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마도 터어키의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동로마 곧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이슬람을 기치로 내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했다. 그후 오늘까지 터어키는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 투르크 족의 나라이다. 

따라서 자신들과 혈연상으로나 문화적으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국건설과정에서 타도해야할 대상, 이슬람화해야 할 대상이었던 그리스문명과 비잔틴 교회를 축소 기록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터어키 역사 책에는 사실상 기원전의 히타이트 시대 이후 1000년 비잔틴 제국사를 훌쩍 뛰어넘어 아나톨리아 지방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기술의 공백으로 인해 터어키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비잔틴 제국

 

로마제국은 5세기 중반이후 이탈리아 본토를 비롯한 서쪽부분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함께 사라졌고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동쪽은 이후에도 계속돼 독특한 문명권으로 발전한다.

 

이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비잔티움의 운명과 함께 하여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원전 7세기에 메가라인들은 보스포르스 해협에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원정군 대장 비자스(Byzas)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이라 부르게 됐다.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이곳으로 로마제국의 수도를 옮기고 새로운 로마를 외치며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렀다.

 

그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자신의 두아들에게 통치하게 함으로써 로마제국이 사실상 동서로 분리됐다.

 

동로마 제국의 형성기는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이래 이교문화와의 조화라는 전환기에 있었고 발칸반도에서 북아프리카까지 이르는 지리적 특성상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도교와 이교문화의 교차지점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그리스도교와 이교적 헬레니즘이 점차 상호융합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교적이고 그리스적이며 동방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제도상으로는 로마적이면서 국민과 언어 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 됐고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기반으로 하는 문명이 이뤄진 것인데 이 문화권이 이른바 비잔틴 문화이며 그 중심이 콘스탄티노플 곧 비잔티움이다.

 

방대한 영토를 지닌 비잔틴 제국은 처음부터 주변의 슬라브, 아랍, 셈, 투르크 등의 문화와 접촉했고 이는 국교인 그리스도교의 선교와도 연결돼 슬라브민족이 개종하는 업적을 낳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위협이 된 이슬람권의 진출을 막는 방패역할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서유럽이 중세를 주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특성과 신학

 

비잔틴 제국 황제의 대관식은 성 소피아성당에서 거행됐다. 여기서 총대주교는 새 권력자에게 왕관을 씌워준다. 이는 비잔틴 교회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렇게 황제는 신이 뽑은 지상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비잔틴 황제에게 지상 왕국이란 하느님 나라의 이미지로서 황제는 천상왕국에서 신이 차지한 위치를 지상교회에서 대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비잔틴 교회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인 황제교황주의(caesaro papism)이다.

 

곧 교회에 관여하는 것이 바로 황권의 본질이라는 사상이다.

 

황제는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권력을 받았으며 모든 국민들이 하느님을 숭배하도록 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의 정책과 교의 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공의회와 교회의 결정사항을 법으로 집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황제들은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고관들을 식사에 초대할 때 12명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만 부르기도 했다.

 

국가와 교회를 동일체로 본 비잔틴 제국의 방침에 따라 비잔틴 교회는 줄곧 국가에 종속된 국가교회적 변모를 보였다.

 

이에대해 요한 크리스도모 성인 등은 교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를 부인하기도 했다.

 

이는 서방교회의 속권과 교권은 각기 고유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양권설, 더 나아가 속권도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속권에 대하여 교권이 우위에 있다는 견해와 충돌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방교회와의 갈등은 726년 레오 3세의 성화상 공경 금지, 800년 카알대제의 황제 등극, 847년 포시우스 분규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심화되다 결국 1054년 결정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비잔틴 교회의 신학은 특별히 수도원에서 많이 발전하였으며 부정신학, 신화, 정적주의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인식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므로 하느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하느님 속성에 대해서 하는님은 어떤 분이시다라는 긍정보다 하느님은 어떤분은 아니시다라는 부정의 서술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인간은 자신을 부단히 정화시킬 필요가 있으므로 사막이나 황야에서 정적 가운데 하느님을 관상하고 직관하는 높은 단계에 까지 이르는 영적 실천을 추구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9월 9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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