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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우리 신앙 선조들이 부른 천당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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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7 ㅣ No.367

우리 신앙 선조들이 부른 천당노래

 

 

천당노래라 부른 천주가사

 

조선의 통치자가 민중을 바른길로 이끌고, 가르치기 위해서 한글을 만들었듯이, 박해시대의 교회는 신도 대중을 교화하고 교육하기 위해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었다. 성직자도 없이 살아가던 박해시절에 아녀자들과 신도 대중에게는 신앙의 뿌리를 심도 깊이 내려주고, 외교인들에게는 천주교를 변론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앙 교육과 신심을 함양시키기 위한 일종의 교리교수법이었다.

 

가사의 내용은 그 시대 교회의 교리와 신앙의 가르침을 소재로 하였고, 그것을 신도들이 체험하고 있는 주변 문화를 차용하여 교리와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가사의 형식은 조선조 후기의 대중 가사 형식인 4·4조(調)로 되어 있으며, 드물게는 7·5조와 8·5조가 있다. 그리고 표현은 귀족적인 한문장(漢文章)이 아니라 평이한 한글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천주가사가 대중 교화를 목적으로 작사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도들은 천주가사를 일명 천당노래, 천당강론, 사주구령가(事主救靈歌)라고 했다. 천당노래라는 것은 천당 영복을 갈망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고, 천당강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사의 내용이 교훈과 교화조로 되어 있어 신도들은 그런 내용을 강론이라고 하였다. 사주구령가라 함은 천주를 섬기고 영혼을 구령하는 데 필요한 신앙의 내용이 천주가사의 골론(骨論)을 이루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천주가사의 주된 관심은 성직자가 없거나 부족하고, 교회 서적마저 부족하고 신앙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특히 아녀자와 무식한 계층의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해결하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천주가사의 구전 전수자들은 거의 부녀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나 지식층의 신도들이 천주가사에 무관심하였거나 전승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글을 모르는 아녀자들에게 구전교육을 강화하여 여자 나이 5~6세가 되면 벌써 할머니나 어머니의 무릎에서 주요 기도문과 함께 천주가사를 암송하였다. 그리고 길쌈을 하거나 밭을 매거나 일상 천당노래를 부르며 고단한 삶을 풀었다. 어디 한번 맛보기로 들어보자.

 

짜사니다 짜사니다           이비단을 짜사니다

성덕으로 틀을놓고           애덕으로 공면(功勉)하며

짜고짜고 다짠후에           누구누구 주산인가

희고서도 좋은옷은           동정자를 주사이다

붉고서도 좋은옷은           치명자나 주사이다

푸르고도 좋은옷은           수절자나 주사이다

검고서도 좋은옷은           지옥자나 주사이다

주고주고 다준후에           후세를 돌아보니

진심갈력 가련하다           당기어라 당기어라

십계실로 당기어라           좁으니라 좁으니라

천당길은 좁으니라           넓으니라 넓으니라

지옥길은 넓으니라           설대같이 곧은길을

높은위에 다다르니           십계문이 열렸고나

가사이다 가사이다           천당으로 가사이다

천당이 어디메뇨              만복지신 여기로다

가지가지 뻗은나무           천주성모 물을주어

삼성체 뻗은나무              12종도 다열렸네

우리전대(前代) 유덕하여   저나무에 열려볼까

모를내라 모를내라           죽는귀향 모를내라

 

 

천당노래의 고장 전라도

 

천주가사가 구전으로나 필사본으로나 전국에서 가장 많이 전수되어 온 곳이 오늘의 전주교구 신앙공동체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고장에서는 천주가사의 전수자를 만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뿌리깊은 역사를 가진 교우촌 출신의 나이 많은 여교우를 만나면 어렵지 않게 천당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천주가사첩(帖)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곳도 이 고장이며, 그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였다. 그리고 천주가사의 구전 전수는 물론, 천주가사를 모아 필사하여 가첩(歌帖)으로 남기는 일이나 천주가사를 짓는 일도 전주교구 신앙공동체의 전통처럼 되어 왔었다. 이처럼 전주교구에 천당노래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 이유를, 이 고장이 1850년대의 천당노래 작사자인 최양업 신부의 전교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체류한 시간이 길었던 곳은 충청북도였다.

 

천당노래가 이 고장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무래도 전라도의 향토문화와 접근해서 찾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전라도는 판소리의 고향이다. 판소리는 여기서 나서 이 자리에서 컸다. 시름과 서러움과 억울함을 물 마시듯 살아온 민초들이 기구한 삶을 극복하며 피를 토하며 득음(得音)한 소리로 부른 노래이다. 그 소리는 절망하는 자의 비명이 아니라 산 자의 득도(得道)한 성음이다. 시름을 푸는 소리, 서러움을 삭히는 소리, 넋에 맺힌 응어리를 푸는 해원(解寃)의 소리였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너름새의 몸짓도, 모두가 심중에 맺힌 갈등을 풀어버리기 위함이었다. 살기가 대근해도 갈등을 가슴에 맺어두지 않고 개운하게 풀 수만 있다면 흥이야 언제든지 되살아나고 신명은 다시 솟고 신바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해원은 민중들의 삶에서 신앙이었다. 너와 내가 얽혀 사는 세상에서 화해(和解)는 공존의 윤리였다.

 

시름을 푸는 노래, 해원의 판소리는 전라도 신앙공동체에 귀설지 않았다. 신도들의 귀에는 동의이음(同義異音)으로 들렸다. 판소리가 해원의 애원성(哀願聲)이라면, 천주가사는 구원의 천애성(天哀聲)이었다. 신도들은 ‘죄 가운데 죽은 영혼 어찌하면 해원할까.’ 하고 그 구원의 천애성을 단전(丹田)의 소리로 부르며 살았다. 신도들의 고향은 현세가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 나라가 본향(本鄕)이었다. “우리가 우거하는 이곳은 영구히 거처할 곳이 아니며, 우리의 본향은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다. 인간계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우리는 마땅히 그곳에 기업을 세워야 한다. 오늘날은 동물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각종 새와 짐승의 몸은 모두 땅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하늘의 백성이므로 머리를 하늘로 두고 있다.”

 

역려(逆旅) 같은 세상에 사는 인간은 항상 본향에 가기까지 그곳이 그리워 탄식하며 산다. 그래서 ‘사향가’만이 아니라 많은 천주가사의 첫머리는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로 시작한다. 천주가사는 망향인(望鄕人)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며, 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기를 애태우며 흠없이 살도록 뜨겁게 노력하는 사람들의 노래였다.

 

천주가사의 내용이 진부하리만큼 윤리 일변도로 짜여져 있는 것은, 현세 사물에 포박된 욕심을 풀어 자유인이 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어울리지 못할 맺힌 것이 있으면 화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맺힌 요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였다. 그것이 해원하는 방식이며 수단이었다. 그래서 양심성찰과 통회, 정개(定改)거리가 노래의 가닥마다 버물리어 있다. 이땅의 하느님 자식들이 성사라면 고해성사 하나뿐인 양 고해성사에 열성을 보인 것도 다 그런 심성에서 나온 것이다. 고해성사는 해원과 화목과 화해의 성사였다. 흥(興)과 신명(神明)과 신바람을 일으켜주는 산 자들의 성사였다. 천주가사는 하느님의 풍속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요, 하느님과 끈질기게 속삭이는 기도요, 하느님의 사랑에 감전된 사람들의 노래였다. 그래서 시름을, 시련과 고통을, 공포와 죽음을 이 노래를 부르며 극복할 수 있었다.

 

신도 공동체의 삶에서 해원의 생활이 어찌 영혼의 문제만이겠는가. 인간의 고통을 풀어주는 사회적인 문제를 풀어주고 없애주는 것도 같은 바람이었다. 신도들은 가난의 시름은 형제애 안에서 서로 나눔의 생활로 풀어갔다. 신분의 제약에서 상민과 천민들이 겪는 억울한 갈등은 형제의식으로 표현된 평등사상으로 풀어졌다. 남녀의 유별에서 사는 여인의 맺힌 가슴은 인격 존중으로 풀 수 있었다. 풀어야 할 것은 정치 문화에도 있었다. 고착된 주자학과 중국 문화 하나만을 정통성으로 고집하는 폐쇄적인 사상도 열어젖히고 싶었다. 그 시대 보수주의자들의 맹목적인 고집도 풀어놓아야 할 대상이었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보수적인 구호만을 외친다고 하여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인 변혁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9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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