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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한 목자의 새로운 가르침 -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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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1

[신앙 유산] 한 목자의 새로운 가르침 : 장 주교 윤시 제우서

 

 

선교사란 누구인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선교사란 어떤 존재인가? 선교사의 국적은 한국이 아니었다. 우리 교회에 첫 선교사로 입국했던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중국인이었고 두 번째 선교사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였다. 그러다가 1836년 이후부터는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9년 독일의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회 수사들이 이 땅에 들어올 때까지 조선 교회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들만이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들 선배 선교사의 뒤를 이어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봉사하고 있다.

 

바로 이 선교사들을 한국 교회사와 한국 교회에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는가? 그들은 혈통과 문화와 관습이 다른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한국인 한국 문화 그리고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존재인가? 물론 선교사 가운데에는 이 땅에서 스스로 이방인으로 남고자 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이곳을 그 자신의 삶과 믿음의 터전으로 삼았고, 우리 겨레와 함께 희로 애락을 나누며, 우리 겨레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했다.

 

이들 선교사는 국적과 혈통과 문화를 우리와는 달리했으나 그러나 그들은 이 땅에서 피와 땀을 흘림으로써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또 다른 세례(洗禮)를 받아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비록 혈통과 국적을 우리와는 달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피와 땀을 통해 우리의 신앙 공동체에 입적된 한국 교회의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활동은 자랑스러운 우리 교회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남긴 신앙 유산은 우리를 새 생명에로 그침 없이 불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순교는 우리 한국 교회의 성장과 한국 성인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경일 주교는 누구인가?

 

우리의 교회를 위해 봉사한 사람 가운데 장경일(張敬一, Berneux, 1814~1866년) 주교가 있다. 그는 조선교구의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받아 1856년 조선에 입국하여 자신이 맡은 신도들을 돌보았다. 그는 자신의 선임자인 주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때때로 사목 교서(司牧敎書)를 보내어 신도들을 가르쳤다.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는 장경일 주교가 1857년 8월 2일자로 반포한 한글로 쓰여진 사목 교서이다.

 

이 사목 교서를 반포한 장경일 주교는 프랑스 르망 교구의 샤토뒤르와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는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루이 18세가 즉위해서 프랑스를 통치하던 때였다. 그는 교구에서 부설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37년 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구 사제로서의 생활을 계속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보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1839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여 외국 선교사로서의 수업을 다시 받게 되었다. 1841년 드디어 그는 베트남 통킹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1843년 이후에는 만주교구의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854 만주교구의 부주교로 선임되었고 이듬해인 1855년 조선교구의 제4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조선에 입국하기 이전 그가 겪었던 이러한 일들은 그의 동양관(東洋觀) 내지 선교관(宣敎觀)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즉,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외부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적지 아니한 피해를 입었고 계속되는 도전으로부터 자신의 교회를 방어해야 했던 프랑스 교회 출신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약간은 보수적이며 호교적 성격이 강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유럽의 낭만주의 사조로부터도 일정한 영향을 받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낭만주의에 의해 다시금 일깨워진 신앙열을 이어 받아 실천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루이 18세와 나폴레옹 대통령과 프랑스 제2제정 시대에 진행되고 있던 대외 팽창주의적 영향이 강했던 사대를 살았다. 그러나 그의 동양에서의 활동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전파를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조선에 입국하여 그는 1866년의 병인 교난으로 순교하기까지 10여 년에 걸쳐 자기 희생적 선교사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배론에 신학교를 세웠고 서울에 일반인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두 개의 인쇄소를 차리는 등 교회의 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1866년 2월 23일에 체포되어 그해 3윌 7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와 같이 그는 그의 땀과 피를 통해 한국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1968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윌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가 순교한 새남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의도 광장에서 그를 성인으로 선언했다.

 

 

‘장 주교 윤시 제우서’에 담긴 글

 

장경일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지 얼마 아니 되어 1857년 3윌 조선교구 성직자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 회의의 결과를 수합하여 사목 교서를 작성했고, 이 사목 교서는 각처의 신도들에게 돌려 보도록[輪示]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장 주교 윤시 제우서’ 즉 “장경일 주교가 여러 교우들에게 돌려 읽힌 글”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신도들에게 보낸 사목 교서의 사본이다. 그런데 장경일 주교는 충청도 전라도의 신도들뿐만 아니라 서울이나 강원도 경상도의 신도나 공소에도 회람 형식으로 베껴서 돌려보도록 했을 것이다.

 

이 사목 교서에는 신도들의 행동 지침과 교리 및 칠성사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신도들의 행동 지침으로는 미사와 여러 예절에 참례할 때 의복을 단정히 하고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함을 먼저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신도들이 세상의 풍습을 범연히 여겨 돌아보지 아니함을 애석해 하며, “짐짓 어른과 아이를 의론치 말고 그 좋은 풍속을 다시 세워 인사와 예모를 큰 본분으로 알아야” 함을 새삼 강조했다. 그리고 어른이나 노인에 대한 존경심을 고취하고 남자들이 부녀자들과 함부로 교제함을 막아 당시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비난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보고자 했다.

 

여기에 이어 이 사목 교서에서는 신도들에게 교리 공부에 힘쓸 것을 권하고 있다. 교리를 모르면 성사를 잘 받을 수도 없고 구령할 수도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장경일 주교는 신도들에게 교리 공부를 무엇보다도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교리 공부를 위한 수단으로 한글이나 한문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도록 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목 교서에서는 신도 생활의 중심이 되는 성사에 대해 밝혀주며, 성사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교서에 나타나는 칠성사에 관계되는 몇몇 규정 중 성세성사를 보면 세례는 회장이 증인들 앞에서 집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성체를 영하기 전후에는 ‘영성체 전송’과 ‘영성체 후송’을 반드시 바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편, 혼배성사에 관한 규정을 보면 결혼 상대방을 속이거나 당사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억지로 혼배를 시킬 수 없음을 밝혀 주고 있다. 또한 과부의 개가를 금지한 것이 원래 조선의 풍습이 아니라 새로 시작된 관행임을 말하며, 과부된 사람들은 영육의 이익을 돌아보아 원의대로 개가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 서한에 담긴 뜻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 주교 윤시 제우서”는 19세기 중엽 당시의 신도들에게 신앙의 의미를 밝혀 주고, 새로운 생활의 규범을 제시해 주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영세를 통해 신분 질서가 아닌 신앙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 공동체에서는 신분과는 상관없이 교회에 대한 지식 여하에 따라 선임된 회장이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이 공동체에 든 사람은 과부의 개가를 죄악시하던 당시 지배층의 관행에 대한 도전을 통해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새로운 가르침을 과감히 실천하여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이바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장 주교 윤시 제우서”를 통해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가르치고자 했던 내용의 일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던 신도들의 용기를 상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서한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에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경향잡지, 1991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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