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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천주교와 개신교의 힘 겨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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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61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천주교와 개신교의 힘 겨루기

 

 

그리스도교가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로 서로 갈리어 겨루고 다투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들은 서로 나뉘어 있다 하더라도, 같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동참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교회는 서로가 힘을 겨루어왔다. 그들은 각자가 자신의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거나, 구원받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거침없이 주장하면서 자신의 외적 성장을 지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겨루기는 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힘 겨루기가 유럽 교회의 대리전과 같은 현상을 띠고 개항 이후 한국 땅에서도 전개되었다.

 

우리 나라의 천주교회는 1784년에 세워져 1백여 년 간에 걸쳐 심각한 탄압을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해 왔다. 그 뒤 1880년대에 이르러 한국 천주교회는 비로소 선교의 자유를 쟁취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 개신교도 전래되었다. 이렇게 전래된 개신교는 1907년을 계기로 하여 그 교세가 천주교를 앞서게 되었다. 이로써 개신교는 전래 23년 만에 가톨릭과 경쟁에서 앞서게 되었다. 반면에 천주교는 교회창설 123년 뒤에 개신교와의 몸집 불리기 경쟁에서 참패하였다. 1907년을 계기로 하여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선교 정책의 차이

 

우리 나라에서 개신교 선교의 성공은 천주교에도 적지 않은 반성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개신교의 선교는 개항기 이후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보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선교 정책의 차이점들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개신교는 그 선교신학과 정책에 있어서 천주교와 차이가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직후부터 천주교는 ‘직접 선교’를 우선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성직자 내지 선교사들은 직접 조선인을 만나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으며, 성사를 집전하였다. 천주교 선교사가 이렇게 해서 만날 수 있었던 조선인은 제한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신교는 직접 선교와 병행하여, 교육, 의료 등 ‘간접 선교’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의 결과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받은 많은 조선인들이 기꺼이 개신교 신도가 되었고, 개신교를 전파하는 사도의 구실을 하였다. 물론 천주교에서도 뒤늦게나마 간접 선교 방법에 주목하기도 했지만, 당시 천주교가 택했던 전형적인 선교 방법은 직접 선교였다.

 

둘째, 성직자 양성 과정의 차이점이다. 원래 파리 외방 전교회는 토착인 성직자의 양성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조선에서 양성한 성직자의 수는 매우 제한되었다. 그들은 신학교를 세우고 운영했지만 교육적 측면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반면에 개신교는 조선인 종교 엘리트의 양성에 성공했고, 조선인 목회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양성된 조선인 목회자들은 비록 개신교 선교사들의 통제 아래에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있어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이들은 근대 학문으로 무장하고서 조선 사회의 지도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성직자 양성 정책에서 발견되는 두 교회간의 차이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선교 활동의 사회적 특성

 

개항기 개신교의 선교가 천주교를 앞설 수 있었던 까닭으로는 그 사회적 배경도 주목된다. 여기에서는 먼저 개항기 당시 신도들의 사회적 특성과 관련하여 그 원인을 검토할 수 있다. 박해시대 한국 천주교는 신앙 행위 자체가 범죄로 취급당해 왔다. 그리고 신도들도 ‘범죄자’ 취급을 받았고, 천인 신분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개항기에 들어와서도 신자들의 신분은 크게 향상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개항기 천주교는 천인 취급을 당하던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문제에 우선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개신교는 전통 유교적 관념에 회의하여 개화사상을 수용했던 개화 엘리트 계층을 효율적으로 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유교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전통사회에서 사학(邪學)으로 규정되었던 천주교를 신앙하기보다는 천주교와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던 개신교를 선호하였다. 개신교는 당시 개화의 모델이 되었던 영국이나 미국의 주된 종교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전통적 지식인 출신이었던 그들은 천주교보다는 새롭게 전래된 영미 계통의 개신교 신앙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개화 엘리트 층에서는 영미 계통의 선교사들이 선교하던 개신교를 선호하였고, 점차 이들이 한국 개신교를 이끌며 발전시켜 갔다.

 

다음으로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발휘했던 역할의 차이를 주목하게 된다. 개신교 평신도 지도자들은 사회개발과 독립운동 등 민족과 사회를 위한 봉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들의 모범이 일반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점차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 평신도 지도자들은 그 역할이 교회 안에 국한되었을 뿐 사회일반에서까지 긍정적 영향을 미친 예는 많지 않았다. 두 교회의 지도자들은 민족과 사회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선교사와 선교 자금의 차이도 들 수 있다. 선교사의 숫자를 비교해 보면 1893년 천주교가 23명인데 비하여 개신교는 77명이었다. 1901년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선교사가 47명이었던 반면 개신교 선교사는 163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또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천주교 선교사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풍부한 선교 자금을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선교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도 차이를 드러냈다. 즉, 개신교는 간접 선교에도 적지 않은 비중의 선교 자금을 집행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교회의 유지를 위한 농경지의 확보 등에 선교 자금을 주로 투하하고 있었다. 선교 자금의 사용 방법은 그 교세의 성장 여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개신교는 100년 이상 앞서서 들어온 천주교보다 더 큰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남은 말

 

개항기 개신교가 천주교 신자의 숫자를 능가하게 된 데에는 당시 개신교와 천주교의 입교 절차가 갖고 있던 차이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개신교에서는 학습 교인과 세례 교인의 차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비신자들도 스스럼없이 동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비기간도 짧았다. 또한 개신교는 성서 독서와 자유기도를 통해서 신도들의 영성을 깊게 해주었고, 그들의 기를 살려주었다. 반면에 천주교는 선교사나 성직자·수도자들이 신도들의 자발적 활동을 제약했던 측면도 있었다.

 

개항기 당시 이땅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힘 겨루기가 진행되었고, 가톨릭은 여기에서 한 발 뒤진 듯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구원이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하나라면, 개신교 형제들은 그 구원의 길을 겨레에게 가르쳐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개신교 형제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경향잡지, 2002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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