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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사의 회고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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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47

한국 교회사의 회고와 전망

 

 

1. 머리말

 

1994년 11월 10일 반포된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는 희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회개를 강조한다. 특히 교회 공동체가 진리에 봉사한다는 미명 아래 행했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직시와 반성을 요구한다.1) 1784년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100여 년의 박해, 일제 식민 통치, 민족 분단 등을 겪으면서 200여 년을 엮어 냈다.

 

가톨릭은 보편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 위에서 일치를 추구할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한국 교회는 보편 교회의 지역 교회이며, 그 주인공은 한국인이다. 그러나 상당 기간 한국인들은 한국 교회의 중심에 있지 못했다. 한국 교회는, 보편성은 추구했지만 보편성을 엮어 낼 한국 교회의 특수성은 창출하지 못했다.

 

그 동안 200여 년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1962년)와 조광의 [한국 천주교 200년](1984년), 그리고 문규현의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 천주교회사](1994년) 등에서 통사적으로 기술되었다. 이 중 [한국 천주교회사]는 순교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에 호교론적 인식이 강하며,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 천주교회사]는 8.15 해방 이후의 교회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교회사를 기술하려 했으나 서술상 한국사와의 연계성이 미흡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한국 천주교 200년]은 한국사의 맥락에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했으며, 민족사의 일환으로서 교회사의 위치를 설정해 보고자 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대희년은 교회의 보편성과 특성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보편 교회와 함께 대희년을 준비하는 한국 교회는 이 시점에서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정교 분리의 한국 교회사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과 문화 변동은 선교사의 도움 없는 자발적인 천주교 신앙 수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국인들은 선교사가 전교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한문 서학서(漢文西學書)를 통하여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켜 1984년 말경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통치권자들은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권위는 왕권이었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가 왕보다 더 높은 존재라고 선언했다. 조선 왕조의 성리학적인 통치 질서 안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던 양반들에게 이러한 천주교 신자들의 선언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양반층은 천주교를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 행위로 여겨 천주교를 탄압했다.2)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보편 교회에 참여하고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3) 근대 사회 형성에의 기여라는 한국 사회에 대한 교회의 기능도 더불어 강화되어 갔다.4) 그러나 포교지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던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은 성직자들에게 의존하는 모습으로 변해 갔다. 신자들은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교계 제도 안으로 밀어 넣었으며, 성직자 중심의 한국 교회가 만들어지게 하였다. 세계 교회가 경이로워했던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의 정체성은 상실되어 갔다.

 

당시 성직자들은 대부분 서구 선교사들이었고, 그들은 한국의 민족 정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많은 노력을 했을지라도 그들은 한국 정서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한국인의 필요에 부응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한국인의 정서에 부응하는 한국 천주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편입될 수 있는 한국 천주교회였다.

 

교회 창설 이후 곧바로 시작된 박해는 1886년의 한불 조약 체결로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개항과 함께 한국사가 혼란 속으로 빠져든 것처럼 교회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개항기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 문제에 대한 신자들의 발언으로 교회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리고 그들은 선교의 자유만을 보장해 준다면 어떠한 정치적 권위라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배의 정당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겠다고 공언하는 정치 권력은, 그것이 한민족에게는 부당한 제국주의적 침략 세력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려 했다.5)

 

1905년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서 교회도 일제 식민 당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제가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제시한 정교 분리 종교 정책은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 정책과 결합함으로써 일제에 의한 한국 사회의 비민족화 정책에 교회가 간접적으로나마 기여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가 천주교회 자체를 비민족화하려 할 때에도 저항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6)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 천주교회의 태도는 한국인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에서 선교권을 보장받고 교회를 유지하려면 식민 통치권자인 일제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거절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교회를 보호한다는 결정을 하면서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외면하였다. 선교사들의 그러한 태도는 한국인들의 호응을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한민족의 가치를 외면하는 천주교회를 용납할 수 없었고, 천주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모든 천주교 신자들이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에게서 식민지 시기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이상을 찾을 수 있다. 안중근은 민족과 교회를 너무나도 조화롭게 이해하였다. 그의 천주교 선교 대상은 동포였다. 그는 천주교를 통하여 동포의 구원을 열망하였다. 그에게 천주교 수용의 목적은 개인 구원을 넘어 동포 구원으로 이끌어졌다. 안중근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통제와 압력은 그의 민족 운동이 반침략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교회와 한민족은 선택 사항이었다.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에게 한민족과 같은 공감대의 형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선교사들이 교회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에게 교회와 민족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교회와 민족은 하나였고, 따라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교회 지도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교회는 민족이었고, 민족은 교회였다. 따라서 그는 이토를 처단하고 사형당할 때까지 민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천주교 신앙을 간직하였다.7)

 

3.1운동에 참여했던 신자들에게서도 민족과 교회를 조화롭게 이해했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은 금지했지만 한국인 신자들 중에는 3.1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적지 않다. 만세 운동을 단죄하는 외국인 주교들이 관할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일원이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민족 의식을 잃지 않고 만세 운동에 참여한 그들의 행동은 신앙과 민족 의식을 잘 조화한 것이었다.8)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기 민족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의 자세는 대체로 소극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족 문제에 대한 교회의 소극적인 태도는 신자 증가율 감소로 나타났다. 1885년부터 1910년까지 6.98%였던 신자 증가율이 일제 식민 통치 기간이었던 1910년부터 1944년에는 2.73%로 감소하였다.9) 대희년 정신에 비추어 일제 식민지 시기의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을 강화하고 도와 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10)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일제하 천주교회의 역할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기에 아직 부진하다. 그러나 그 인식은 다분히 관념적인 데서 비롯되었다. 사료의 제약 때문이겠지만 한국 교회사는 외국인 선교사를 포함하여 성직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엮어지고, 반면 한국인 신자들의 활동은 간과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 모두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직자들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활동도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의 역할을 부각시키려면 그들의 교회 활동을 추적해야 한다. 더불어 민족의 요구를 외면하였던 교회의 태도가 어떠한 여건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철저한 자료 조사와 사료 분석에 기초하여 규명해야 할 것이다.

 

 

3.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

 

1945년 8.15 해방은 교회에도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교회는 그 동안 침체되었던 선교를 활성화시키고, 신자 수를 증가시키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38선과 6.25 한국 전쟁은 국토와 민족을 분단시켰을 뿐 아니라 휴전선 이북에서는 신앙의 자유마저도 압박하였다. 전쟁 이후 북한 교회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강탈당하였다. 반면 남한 교회는 외국 교회의 원조와 신자들이 열심히 활동하여 신자 수가 급증하고 교세가 성장하였다.

 

1960년대는 세계 교회사적으로도, 한국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1962년 세계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였으며, 한국 교회는 독립된 정식 교구로 승격하였다. 한국 교회는 교계 제도적인 측면에서 선교 지역의 교구였다가 정식 교구, 완전한 교구가 되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전환기 한국 교회의 입장을 확인하고, 한국 교회의 쇄신, 민족과 인류를 향한 봉사의 자세를 다시 점검하게 되었다.

 

그러나 휴전 이후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교회는 1970년대에 선교 정책의 전환을 요청받았다. 1950년대에 16.5%였던 연평균 신자 증가율이 1960년대에는 6.2%로, 1970년대에는 5.2%로 계속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국 교회는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반성하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롭게 제시되고 있던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정의 구현 운동으로 한국 교회에 시도하였다. 1970년대의 정의 구현 운동은11) 한국 교회사뿐 아니라 세계 교회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반성, 사목 정책에 대한 반성, 민족과 호홉을 같이 하고자 한 교회의 태도 변화였다. 당시 한국 교회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자세를 가다듬어 보고자 했다.

 

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1970년대의 사회 정의 구현 운동을 질적으로 한층 성숙시켰다. 1970년대의 교회가 민족을 '위해서' 분투하는 자세를 취했다면, 1980년대의 교회는 민족과 '함께', 민족 공동체 '안에'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더욱 바람직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사회 정의 구현 운동은 한국 교회 전체의 행동이라기보다 일부의 행동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계 교회의 보편성에 입각하면서도 한민족의 특수성을 받아들일 때 바람직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정립할 수 있다. 당시 교회는 한국의 시대적,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는 노력이 부족했으며, 그런 점에서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반성을 시작으로 교회의 예언직 사명에 대해 고찰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한편 1980년대에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와의 협력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 행사와 103위 한국 성인 탄생은 한국 교회사를 지역 교회사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교회사로 그 범위를 확장시켰다. 또한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써 세계 교회와 함께 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정의 구현 활동과 1980년대의 대규모 신앙 집회들은 한국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성장시켰다. 1980년 132만 명이던 신자수가 1989년 261만 명으로 급증하였으니 10년 동안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이 얼마나 한민족의 마음을 그리스도교화했는지 의문이다. 신자 수가 증가한 반면 냉담자와 거주 불명자 등 '교회에서 멀어지는' 신자들이 계속 증가했다는 것은 교회의 성장이 내실 없이 외형적 성장에 치중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12) 양적인 성장, 외형적 성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의 연구가 진행되고, 그 결과 반성 자료들이 한국 교회의 내실화에 적용될 때 진정한 교회의 성장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 대희년과 민족의 화해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한국 교회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는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이다. 희년의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은 자유를 되찾아주는 해방과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회복이다.13) 이러한 희년 선포의 대상이 구약에서는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갇힌 이들과 억눌린 이들의 해방'에 역점을 두었다.14) 그리고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에서는 '자유롭게 되어야 할 모든 주민들의 전적인 해방'으로 확대되었다.15) 그러므로 민족 분단의 현실에 있는 한국 교회는 민족의 화해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책임의 일부도 부여받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민족의 미래와 직결된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16) 교회는 민족 구원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민족 안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미래의 한국 교회에 대한 한국사의 평가는 분단 극복 운동 참여와 기여 여부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정통 민족 운동의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한국의 교회는 자신의 민족 복음화를 위한 노력의 좋은 결과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17)

 

한국 교회는 한국 민족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 교회와 이탈리아 교회, 그리고 스페인 교회가 각각의 교회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 국가가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 각각의 교회사는 결코 보편 교회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보편 교회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같은 유럽 대륙에 있으면서도 나라마다 다를진데, 아시아에 위치한 한국 교회에서 유럽 교회와 같은 교회사의 형성을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주교회가 보편성을 추구한다지만 그것이 어디에서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동일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그것이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천주교회가 이루고자 하는 바이다.18) 교회의 전례와 전통을 존중하면서 고유한 교회사를 구성해 낼 때 한국 교회사는 보편 교회와 함께하며 더욱 긴밀한 교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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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 35항 참조. 

2) 조광, [한국 천주교 200년], 햇빛 출판사, 1984, 36면. 

3) 최석우, "조선교구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교회사 연구] 4,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3, 80면. 

4) 조광, "조선교구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교회사 연구] 4,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3, 129면. 

5) 한국 사목 연구소, [국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 137면. 

6) 노길명, "한국 그리스도교의 성격 형성과 사회 개발 사업", [아세아 연구] 27, 제2호, 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1983, 160면. 

7) 윤선자,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애국 계몽 운동", [안중근의 의열과 동양 평화론], 안중근 의사 숭모회, 1998. 10., 33-34면. 

8) 윤선자, "3.1 운동기 천주교회의 동향", [전남사학] 11, 전남사학회, 1997, 494면. 

9) Compte Rendu de la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조광, [한국 천주교 200년], 59면. 

10) [제삼천년기], 33항 참조. 

11)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 - '70년대 정의 구현 활동에 대한 종합과 평가], 분도 출판사, 1985. 

12) 문규현,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 천주교회사], 빛두레, 1994, 497면. 

13) 2000년 대희년 주교 특별 위원회, [대희년 길잡이] 1, 13면. 

14) 신교선, "성부께서 이루시는 희년의 축제적 의미", [사목] 240호(1999. 1.) 10면. 

15) [제삼천년기], 12항. 

16) 민족의 화해를 위한 교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민족 화해 학교 지음, [민족의 화해를 향하여],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 화해 위원회, 1996, 참조. 

17) 조광, [한국 천주교 200년], 112면. 

18) 교황청 2000년 대희년 중앙 위원회 사목 위원회, "2000년 대희년을 향하여 - 사목 지침(1996.1.)", 2000년 대희년 주교 특별 위원회, [새날 새삶] 대희년 맞이 5, 1998, 58면.

 

[사목, 1999년 2월호, 윤선자(전남대학교 강사,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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