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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수치심 없는 사회: 정의의 시대를 구현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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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17 ㅣ No.959

[경향 돋보기 - 수치심 없는 사회] 정의의 시대를 구현하는 길


날마다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두 가지 이상한 현상을 본다. 한편으로는 이른바 ‘한류’가 연예와 음식뿐 아니라 ‘한글’까지 세계 각지로 보급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민족이 역사 안에 축적한 문화역량의 성과라고 생각된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에 긍지를 갖게 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사회의 정치 · 교육 · 사회도덕 분야에서 수치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긍지를 갖게 하는 면은 한국인에게 희망의 여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너무도 수치스러운 면들은 민족 역사의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성경에서도 가라지의 비유가 있어, 밀밭에 기생하는 나쁜 식물처럼 빛에 따라붙는 어둠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일깨움이 있다. 그러나 빛을 향해가는 발걸음은 마땅히 더 활발해야 한다.


정의를 실천하는 몇 사람이라도

인간은 누구나 미약하고 한계를 지니고 있어 자칫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잘못”이라고 「논어」에 씌어있다. 잘못에 대해서는 염치를 알아 미리 경계를 한 선인들도 있다.

조선시대에 퇴계는 벼슬을 해도 한직을 원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친형님이 충청감사라는 상위직을 맡아 같은 지역으로 왔다. 그러자 퇴계는 형의 그늘에 염치를 느껴 경상도의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다산에게 임금이 「논어」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고 범위를 전했다. 다산은 문제를 미리 아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다며, 쪽지를 받지 않고 아전을 돌려보냈다. 다음 날 「논어」의 전체 범위를 가지고 강의를 했다. 정조 임금이 다산의 결벽에 감복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은 자식들이라든가 친형을 미리 단속하지 않아 그 친족들이 비리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현 이명박 대통령 친형도 이른바 영포지역 인맥의 비리 혐의에 관련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조 왕정 시대에도 청백리(淸白吏)들이 있었다. 영의정을 지낸 정승이 너무 가난해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비용을 나라에서 보내준 사례가 있다. 청백리는 그 가난을 가문의 영예로 생각했다.

현대 유럽 체코의 대통령 하벨은 극작가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되고는 개인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청렴하게 연임의 임기를 마쳤다. 한 공동체의 상위권자가 솔선수범하면 그 아래에서 누가 감히 부정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한국은 헌법상 민주주의 국가지만 정부 수립 후 60년이 지나는 동안 민주정치의 시기는 제2공화국 장면 정권 시절 9개월과 김대중 · 노무현 정권 시절 10년을 합해 11년에 불과했다. 일제 식민지에서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에 넘어온 시기는, 3 · 15부정선거에서 실상을 보듯이 독재정치의 시대였다.

1960년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신익희 선생은 선거 유세를 통해 대한민국 공무원 직함에서 ‘관(官)’ 자를 떼자고 했다. 당시 대만의 공무원 지칭에도 ‘관’ 자가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비서관 · 통역관까지 벼슬의 개념을 붙이느냐고 했다. 하향식 권위주의 의식 자체가 문제인 채로 오늘날까지 공무원 직제에서 ‘관’ 자를 붙이고 있다.

4 · 19민주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 합헌 정권을 전복한 5 · 16 군사 쿠데타 정권은 전 정권의 구악을 일소한다고 혁명재판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 재판의 유죄판결은 단 1건으로서 한 장관이 중고품 냉장고 한 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재판 전에 공개된 구악의 혐의 사건들이 수백 개였는데 유죄다운 유죄 판결이 없었다. 비리를 저지를 시간적 여유 자체가 없었다.

구악을 일소하면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고 한 군사혁명 공약이 있었음에도 쿠데타 군은 복귀하지 않았다. 공화당 정권을 만들고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을 거쳐 무기한 절대 통치인 유신헌법 시대에까지 진입했다. 이 정권의 후계 세력이 오늘의 이른바 보수 여당이다. 무엇을 지킬 것이 있어 보수를 하는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 정권이 작성한 것을 원안대로 사용했다. 군인들이 재벌들과 정경유착을 한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실상이었다.

반군사독재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의 생명을 희생시킨 부담도 보수할 것인가.

1987년 6 · 10시민항쟁의 승리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절정이었다. 박종철 · 이한열의 죽음으로 격앙된 시위 군중이 서울을 지배한 6월 10일이 저물어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경찰 병력이 시위 행렬을 계속 해산시키려 하자 대학생 수백 명이 천주교 명동성당 구내로 들어가 진을 쳤다. 당시 명동성당은 계속 시국기도회를 여는 민주화의 성역이었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학생들 앞에 나타났다. “여러분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돌멩이와 화염병들을 땅에 내려놓아라. 폭력은 영원한 악순환이다. 경찰 병력이 성당 안으로 진입해 여러분을 연행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막아서겠다. 그리고 여러분이 안전하게 학교와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하도록 경찰 당국의 약속을 받아내겠다.”고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 병력이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나를 밟고 넘어가라. 그다음에 신부들을, 그다음에 수녀들을 밟고 넘어가서 학생들을 연행하라.” 했다.

김 추기경의 이 결연한 통첩에 정부 당국이 승복했다. 명동성당이 여러 대의 버스를 대절하고 한 버스에 신부 한 명씩 동승했다. 학생들은 방향을 나누어 버스를 타고 먼저 학교에 들르고 각기 안전하게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신군부 정권은 6 · 29직선제 개헌을 선포했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명예혁명이었다. 이 6 · 29선언의 상황을 사람들은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여기까지가 교회의 역할이며 역사에 대한 봉사의 실천이었다. 그 다음의 정치적 현실 운영은 정치인들과 국민의 몫이다.

대통령 직선제 정국에 진입하자 민주화 투쟁 과정의 동지인 김영삼과 김대중 양인은 국민에 대해 약속한 후보 단일화 원칙을 어기고 동시 출마를 했다. 그 결과로 37퍼센트의 득표를 한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해 신군부 통치를 5년 더 연장하게 되었다.

어렵게 쟁취했고 가능성이 보장된 민주회복의 여건이 민주화 세력 내부의 이기적 정파 분열에 의해 다시 상실되었다. 이 차질의 단계에서 한국의 현대사는 보편적 가치와 정의의 개념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제1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켜 친일 오류가 있는 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어서 유신 독재의 후계 세력인 신군부 정권을 상대로 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이 패배했으니, 역사적 오류가 있는 이들이 공공연히 활개를 치는 사회가 되었다. 그 여파가 오늘의 이명박 정부 시대에 이어져 그야말로 ‘수치심 없는 사회’의 극치를 지금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분야의 하도 많은 부정과 비리는 이루 거론하기조차 민망하며 심지어는 중학교 학생 사회에 폭력조직이 침투해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들의 자살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나이 어린 학생 사회의 질서마저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와 교육 당국, 그리고 정의로운 교육을 표방한 이른바 전교조 교사 조직도 어떤 노력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 ‘수치심 없는 사회’를 바로잡으려면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떠한 실천이 있어야 할까. 드러나 있는 피상적 사회현상에 대한 시시비비의 거론으로는 방법이 되지 못할 것 같다.

‘수치심’은 양심의 문제로서, 본질적인 차원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실천’의 첫걸음이 된다. 이 각성을 위해서는 좀 더 새로운 개념과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인간성의 진보를 통해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 급격히 사람들을 보수와 진보로 분류하는 경향이 생겼다. 종래에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거나 민주화의 당위성을 긍정하는 사람들을 한데 묶어서 ‘진보’의 레테르를 붙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진보는 ‘종북 좌파’라고까지 말하는 이들이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말을 농담처럼 하더니 날이 갈수록 고정관념처럼 되어, 듣는 이의 마음을 섬뜩하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명박 정부 시대에 들어와, 분단된 남북관계에서 대립을 격화시켜 나아가는 정부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천안함 폭파 사건을 계기로 남북 교류와 경제협력 관계가 전면 중단되었다. 이 중단 현상에 따른 남한의 경제 손실이 9조 원대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김대중 · 노무현 정권 시대에 남북관계는 모처럼 활로를 열었으며, 이것은 그 시대의 가장 큰 성과였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라든가 대립적 감정은 그것대로 문제 제기를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경제와 문화의 교류는 증대할수록 대한민국의 입장은 떳떳한 것이다.

지금 북한의 경제 상황은 남한에 비해 20분의 1 정도로 낙후되어 있고, 식량 기근으로 탈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굳이 북한을 선망하고 추종하는 종북 좌파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통일 이전 독일에서 서독이 20년간 동독에 대해 인도적 원조를 하면서 교류를 증대한 결과 동독 주민들이 스스로 장벽을 무너뜨려 통일이 된 역사적 사례도 있다. 이렇게는 하지 못할망정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남한의 현 정권이 입지가 불안하니까 색깔 공세를 취하는 것이 이른바 종북 좌파 발설이다. 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또 한 측면으로 역사적 차질의 현상이 있다. 그것이 이 선거의 계절에 통합진보당의 이른바 당권파 젊은 층이 비례대표 후보 공천 과정을 양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언제 다수결 투표를 했느냐?”는 식으로 가치 중심을 ‘당성’에 두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따른다.”는 많이 들어본 구시대 이데올로기 타성의 모습이다. 이래 가지고서는 야권연대의 힘으로 민주화 정권 교체를 하는 데에 지장을 줄 뿐이다.

이렇게 ‘진보’로 지칭을 받는 쪽에서도 반성하고 쇄신해야 할 병통이 분명히 있다. 지난날의 소련이 자체적으로 붕괴한 것은 자유와 양명한 민주주의가 없고 일당 집권의 경직성이 체제의 동맥경화를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진보’는 불온한 말이 아니다. 보편적으로 쓰는 좋은 말이다. 현실 세계에는 온갖 이념과 시설들이 있다. 이것들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주체로서 ‘인간’이 있다. 그러므로 진보도 이념이나 시설보다 인간의 인격과 인간성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흐르지 않고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 흐르는 맑은 물이 진보이다. 인격은 고여서 썩는 수치를 씻어내고 계속 신선한 정신차원을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가 보수인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의 두 요소인 사유재산과 시장경제가 악인 것도 아니다. 인간 자유권의 연장 차원에서 정당하고 적절한 사유재산은 좋은 것이다. 시장경제는 창의와 능률을 위해 유익한 것이다. 다만 사유재산에도 사회적 의무가 있는 것이며, 시장경제에서는 팔고 사는 여건이 공평해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에서도 이기적 모리 행위와 약육강식의 횡포는 도덕성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수행할 책임이 바로 ‘인격의 진보’에 있다.

진보가 신앙의 면에서는 ‘완성’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인간이 자유와 책임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힘에 의해 인간의 자기완성, 사회의 자기완성을 가능케 하는 ‘공동선’을 향해” 우리는 인간다운 삶의 길을 가야 한다.

민주주의도 승자 독식이 아닌 합의제 의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교에서 어린이들은 경쟁을 하고 상을 타는 것만 목표로 삼지 말고, 행복한 인간관계를 배워야 한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폭력사고도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학교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대곡초등학교이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나라들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권에 실제로 있다.

원래 염치를 중시하던 문화 전통의 나라 한국이 이제는 수치심을 털어버리고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인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평화도 정의의 구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치스럽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사는 인문적 선진국이 되도록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 구중서 베네딕토 - 문학평론가, 수원대 명예교수.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과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냈으며, 저서로 평론집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시조집 「세족례」 등 다수가 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구중서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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