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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빈곤과 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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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10 ㅣ No.793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 빈곤과 실업

 

 

작은 반성

 

농촌 교구의 사제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경제적으로 그리 어려운 경험이 없다. 한국에서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록 도시 교구와 농촌 교구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에서 어느 정도 중산층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가난을 실천하는 사제들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제들은 적어도 소비수준에서 보면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제가 본당에서 만나는 신자들 가운데 빈곤층은 매우 드물다. 물론 본당 신자들 가운데 기초생활 보호대상자가 있지만, 그 수는 매우 적다. 현실적으로 보면, 본당 안에서 성사생활과 봉사활동을 하려면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빈곤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본당 안에서 성사생활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경제적 삶의 조건과 본당 환경 속에서 사제는 빈곤의 문제에 무관심해지기 쉽다.

 

 

빈곤의 문제

 

빈곤을 규정할 때 흔히 절대적 빈곤, 상대적 빈곤, 주관적 빈곤, 이 셋으로 분류한다. 절대적 빈곤이란 육체적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책적 빈곤선은 이 절대적 빈곤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상대적 빈곤이란 한 사회의 평균 소득 수준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계층을 빈곤층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상대적 빈곤 개념은 계층 간 불평등 문제를 고려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빈곤의 문제가 자칫 불평등의 문제로 환원되어, 해소될 수 없는 영구한 문제로 귀착될 위험을 내포한다. 곧, 빈곤의 문제가 계층 간의 갈등 문제로 변질되어 절대적 빈곤층에 대한 국가의 빈곤 정책이 소홀히 취급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주관적 빈곤 개념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 상태에 대해 가지는 느낌들, 곧 정서적 측면을 고려하는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한국의 빈곤율은, 통계의 방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가처분 중위소득(소득순으로 전 국민을 일렬로 세웠을 때 중앙에 있는 사람의 소득)의 50%를 빈곤의 기준선으로 설정할 경우, 우리나라 인구의 약 17%가 기준선 아래에 있다. 곧 300만 가구 이상이 빈곤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국가가 빈곤 문제에 개입하는 방식은 국민 기초생활 보장제도로 대표되는 공공부조(public assistance)를 확산한다거나 고용을 확대하여 실업률을 낮추고 실질(적정) 임금을 보장하는 등의 방법에 맞춰지고 있다.

 

 

빈곤의 풍경 1 : 최저생계비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

 

얼마 전 어느 국회의원의 일일 최저생계비 체험 수기 때문에 인터넷 여론이 소란스러웠다. 일일 최저생계비 6,300원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 가능할 것 같다는 그의 수기는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최저생계비는 국민의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최소한의 비용을 의미한다. 먼저, 최저생계비의 기능을 이해하려면 국민 기초생활 보장제도에 대해 알아야 한다. 200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국민 기초생활 보장제도는, 한마디로 가구의 소득액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할 경우 정부가 해당 가구에게 최저생계비와 소득액의 차이만큼 급여를 지급하는 제도다. 그만큼 최저생계비는 국민 기초생활 보장제도의 수급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된다면 얼마의 급여를 받느냐, 이 두 가지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이것 말고도 긴급복지 지원, 장애연금(수당), 보육료 지원 등 각종 사회복지제도의 대상자를 선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최저생계비다.

 

최저생계비는 3년마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이뤄지는 계측을 바탕으로 책정된다. 계측이란 연구원들이 시장조사를 통해 최소한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가격, 수량을 파악하는 과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최저생계비를 책정한다. 내년 최저생계비는 4인 가구 기준 143만 9,413원으로 결정됐다.

 

한편, 올해 7월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체험 캠페인을 진행한 바 있는 참여연대 측은 이번 인상안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대폭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던 걸 생각하면 너무 낮은 인상률이고, 극빈층에 대한 지원 기준이 되는 최저생계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올해도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빈곤의 풍경 2 : 워킹푸어 300만 시대

 

워킹푸어(working-poor, 근로빈곤층)란,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워킹푸어의 확산은 한국에서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열심히 일하고도 한 달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300만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워킹푸어는 일할 수 있는 체력과 의지가 있고, 실제로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애인, 독거노인, 조손가정 같은 전통적인 빈곤층과 다르다.

 

임금상승률이 주거비, 교육비,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워킹푸어의 확산을 부추긴다. 소득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기본적인 생활비가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보니, 노력해도 삶의 질이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빈곤의 풍경 3 : 청년실업

 

20대 고용이 계속해서 줄면서 청년실업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청년 백수 100만 시대라는 말이 떠돌고 있다. 경기 침체에 따른 실업과 산업 구조의 고도화에 따른 구조적 실업이 겹침으로써 실업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신규채용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어 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청년실업의 증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 사회의 인적 자본의 질을 떨어지게 해 잠재성장률에 악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최근 외무부장관 딸 특채 사건에 대한 대중의 분노, 특히 취업 경쟁에 지친 젊은 세대가 느끼는 분노는 계급적 분노로 확산될 위험성마저 보인다.

 

 

빈곤과 실업에 대한 교회의 입장

 

교회는 빈곤이 “교회가 희망하며 추구하는 완전한 인도주의의 실현, 곧 개인과 민족들이 더욱 인간다워지고 더욱 인간적인 조건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그래서 “그리스도교적 양심에 가장 큰 도전이 되는 문제의 하나”임을 인식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449항).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이라는 사회교리적 입장은 빈곤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지속적 관심을 촉구한다.

 

교회는 빈곤과 실업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한다. 많은 경우 빈곤은 인간 노동의 존엄성 침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진리 안의 사랑”, 63항). 또한 빈곤을 퇴치하고 지나친 부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사회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고자 경제 체제는 “모든 사람의 안정된 고용 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상대적 빈곤이 크게 증가하면, 사회 통합이 어려워져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질 뿐만 아니라 경제 역시 모든 사회적 공존에 필수적인 신뢰, 의존, 법규 존중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사회 자본’의 점진적 손실로 위험에 빠지기”(“진리 안의 사랑”, 32항) 때문이다.

 

교회는 언제나 인간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해 왔다. 노동은 인간의 기본권이고 모든 사람에게 속한 선이며 인간 존엄을 표현하고 증진하는 적절한 방법이다(“간추린 사회교리”, 287항). 교회는 인간의 본질적 존엄을 드러내주는 “품위 있는 노동”(“진리 안의 사랑”, 63항)을 강조한다. 따라서 “노동 문제가 사회생활에 미치는 도덕적 영향을 고려할 때, 실업이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에게는 ‘사회의 실제적 재앙’임”(“간추린 사회교리”, 287항)을 분명히 한다.

 

교회는 “완전 고용이 정의와 공동선을 지향하는 모든 경제 체제에서 의무적인 목표”(“간추린 사회교리”, 288항)가 되어야 함을 천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실 안에서 인간 노동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음 또한 직시한다. 그러면서 “구조적 실업의 지속, 경쟁과 기술 혁신에 대한 요구와 복잡한 금융의 흐름이” 품위 있는 노동의 실현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14항).

 

 

빈곤과 실업의 문제에 대한 교회 자신의 성찰?

 

빈곤과 실업(고용)의 문제를 위한 교회의 노력은 사회교리적 선언에만 그치고 있는가? 교회 자신이 교회 안에서는 빈곤과 실업의 문제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교회는, 본당 예산에서 자선비의 비율을 높이거나 빈첸시오 등의 자선 봉사 활동 단체들의 활동을 늘리는 방식을 통해 지역 사회 안의 빈곤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회복지 기관을 운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현실에서 대부분의 본당들은 본당의 외형적 규모에 비해 사회복지에 대한 본당의 관심과 기여는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이다.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자리 창출이나 고용환경의 개선에 대해 교회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어느 사제의 지적처럼 “교회는 사회가 일자리 창출을 위하여 힘쓰도록 지적하고 격려해 주는 역할이어야 하지, 교회가 직접 일자리를 창출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업처럼 이윤을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가 운영하는 외부 기관이나 사업체(병원, 학교 등)에서는 교회의 사회교리적 선언들이 더 분명하게 실천되어야 한다. 교회가 운영하는 사업체 안의 종사자들이 “품위 있는 노동”을 영위하고 있는지, 그 사업체가 혹시 교회 관계자들의 혈연을 고용(특채?)하여 균등한 고용기회 제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교회는 늘 스스로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교회의 사회교리적 선언들이 더 큰 힘을 가지려면, 언제나 그 선언들이 교회 자신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문경 모전동성당 주임이다.

 

[경향잡지, 2010년 10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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