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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의 해: 가족, 그 기억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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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09 ㅣ No.513

[신앙의 해 특집] 가족, 그 기억과 희망



1.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태어났다.’ 탄생의 체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와 한 몸이 되어 그의 가장 내밀한 배 속에서 먹고 마시고 성장해갔다는, 때가 차서 그 누구의 도움으로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빛 속에 안기게 되었다는, 자신이 눈을 뜨기도 전에 누가 먼저 자신을 바라봐주고, 자신이 부르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주었다는, 양팔을 뻗쳐 누군가를 안을 수 있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자신을 한없이 광대한 가슴으로 포옹해주었다는, 말을 할 수 있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건네오고 있었다는, 무엇을 원해야 할지도 모르던 그 때에도 누군가 먼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밀어 오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바를 갈망해주고 있었다는, 그런 체험. 타인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생겨났고, 다른 이 없이는 생존할 수조차 없었다는, 타인이 자신에게 얼마나 그토록 절대적인지를 온 몸으로 알게 된, 자신보다 타인이 먼저 존재해 있었다는 체험 말이다. 자신이 ‘하는’ 체험이 아니라, 자신에게 ‘쇄도해오던’ 체험, 그것. 자신이 스스로 ‘알게 된(cognitio)’ 체험이 아니라, 자신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re-cognitio)’ 이와 같은 체험이 ‘태어난’ 자신의 몸에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음을 확인하곤 한다. 명확히 서술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드라마(drama, δρaμα : 활동), 자신의 존재에 앞서 있는 타인의 행위들, 자신의 행위에 선행해 있는 타인의 활동이 자신의 탄생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자신의 역사(歷史) 그 이전에 타인들이 창조하고 있던 ‘선사시대(先史時代)’를 읽게 되는 것이다. 타인이야말로 나의 기원이요 내 존재의 하부구조요 내 행위의 동기라는 진리들(veritates)을 ‘본성적으로 알게 된다.’ 내 ‘의식’이 분석종합하여 마침내 긍정하기 이전에 내 몸은 이런 진실들을 통합적으로 또 수행적으로 매 순간 앞서 증언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먼저 ‘아는’ 이는 없다. 아버지로 ‘믿는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먼저 ‘인식’하는 이는 없다. 어머니로 ‘신앙한다.’ 그 믿음과 신앙을 두고 “틀림없다!”고 한다. 이성이 이 믿음과 신앙을 계산과 추론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훨씬 이후이다. ‘나’라는 존재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아낌없이 자신의 전부를 나누고자 했던 행위로부터 비롯된 열매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내 ‘의식’은 복잡한 과정, 곧 부모로 믿고 신앙하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또 다른 일련의 드라마를 통하여 비로소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진실들은 내가 거침없이 차지하였지만 나를 무턱대고 환대해주었던 ‘가정’이라고 불리는 공동체에서 다양한 언어들로써 매일 선포된다. ‘나’에 관한 진술이 나로써만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타인 혹은 타자에 대한 믿음과 신앙만이 ‘나’라는 신비를 꿰뚫어 보는 시선이 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가족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이 시선으로 ‘나’의 희망, 전망(visio)을 획정(劃定)짓게 된다. 타인, 타자야말로 내가 ‘나’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폴리쾨르)임을 터득하게 된다.



2. “그 후로 그들은 아들 딸 많이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동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말은 인간의 참으로 오래되고 깊은 욕망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있던 어린 ‘나’들은 마침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더불어 행복해하곤 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과정 끝에 성취하게 된 혼인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게 늘 간결했다. 그러나 이미 읽어버린 동화보다 훨씬 길고 고단하게 이어져갈 혼인에 관한 서사의 첫 문장으로는 최고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불꽃의 감정이 이제 육화될 시기가 된 것이다. 사랑이 만들어내고 있던 불의 제전 앞에서 아주 간결하게 “예!”라고 뱉아낸 응답은 그 후로 오래오래 이어져갈 일생을 두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을 두고 내 스스로 내리는 ‘결단’이었다. ‘감정’이 가져오는 행복이 그냥 내게 주어지는 것 혹은 들이닥치는 것이었다면, ‘결단’으로 시작된 행복은 내 스스로 건설해가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라는 말은 맞고도 틀린 말이다. 이 무덤은 사랑이 ‘살해’되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변모’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년의 ‘나’와 청년의 ‘나’가 똑같은 ‘나’이듯이 연애의 사랑과 혼인의 사랑은 바로 그 ‘사랑’이다. 그런데 내가 ‘성장’해가듯이 또 그것이 내게 필요하고도 좋은 일인 것처럼, 사랑이 그렇게 ‘성장’해가는 것, 그것은 사랑에 필요하고도 좋은 일이다. 성숙한 사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감정에 일생을 걸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건설해간다. 누군가와 하나가 되는 감정의 체험이 “예!”라는 결단을 이끌어냈다면, 그것은 사랑의 속임수,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사랑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논리(logos)로 인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사랑, 혼인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다(사제가 남녀 간의 사랑이나 혼인생활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것들이 담고 있는 ‘진리’ 때문이다). 사랑은 진화한다. 순간에 머물지 않고 역사를 지니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랑은 결단을 내리라고 다그친다. 이 결단을 통하여 “사랑은 건설한다(caritas aedificat)”(1코린 8,1). “예!”를 통하여 사랑은 우우거리며 광야를 떠돌던 방랑생활을 종식하려 한다. 사랑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이 성장해갈 ‘집(ethos)’을 찾고, ‘오래오래’ 혹은 ‘영원’이라는 언어를 감히 입에서 떼려고 하지 않는 자신의 욕망에 합당한 성전(templum)을 짓고자 한다. 알고는 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르지 못할 ‘영원’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은 ‘사랑하기를 사랑하면서’ 성취된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랑은 자신의 발걸음을 비춰줄 빛과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한다. 영원하신 분 안에 머묾(contemplatio)으로써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사랑은 ‘영원’을 살게 된다. 그분의 빛과 힘을 먹고 마시면서 말이다. 결혼한 사람들끼리도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는 게 말이 되냐고 쑥덕거리곤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음을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한다. 많은 남녀들이 사랑에 관해서 다 아는 것처럼 행세를 하지만, 사실, 사랑은 누구나 배워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몸이 개재된 사랑에 관한 언급 없이는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은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당신만을!”이라고 약속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 사람과 ‘영원히 신의를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거짓으로 “영원히 당신만을!”이라고 고백하는 이는 적다. 대부분 자신의 들뜬 마음 안에 담겨진 진실을 말한다. 그 진실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내 머리가 모르는 ‘영원’을 내 마음 안에 심어주신 분, 영원히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 영원에서 영원까지 사랑하고 계시는 분, 곧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

 


3. 신앙은 머리로 어떤 이론을 습득하고 그것대로 행위하기를 요구하는 윤리지침이 아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만남’이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신앙의 빛” 4항). 만남을 통하여 다른 이가 내 마음에 현현해오는 사랑이 나를 새롭게 빚어냄으로써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내어주는 데에서 내 행복이 실현됨을 알게 되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데에 신앙이 자리한다. 하느님이 먼저 나를 사랑했고 먼저 나를 믿었고 먼저 내게 말을 걸었고 먼저 내게 희망을 거셨다. 그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알게 된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를 사랑함으로써 알게 되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가정은 내가 ‘다른 이’를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장소이면서 그 만남을 끊임없이 쇄신시켜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한 믿음을 자아내는 곳이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 중의 다른 이’, 곧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다. 이 믿음과 신앙은 무엇보다 누군가를 ‘낳는’ 체험을 통해 성장한다. 당신의 모상으로 인간을 지어내신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이 그대로 재현되고 목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억의 근원과 희망의 극점은 새로운 외연을 지니게 된다. 인간의 부성과 모성 안에 하느님께서 친히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가정교서” 9항). 자식을 위해 목숨을 다하는 것은 부모의 본능이라고 한다. 이 ‘본래의 능력’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하는 모든 사랑은 이 본능의 실현과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성부께서 낳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의 ‘계보’ 안에 깃들여진 복음을 충만히 살아갈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계시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모든 사랑의 원천이요 빛이며 힘이요 목적지다.

[2013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김상용 요셉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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