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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사10: 최초의 한국 공의회 개최(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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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6 ㅣ No.382

한국 교회사 (10) 최초의 한국 공의회 개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점으로 한 교회의 전망

 

 

1931년, 이 해는 조선교구가 설정된 지 꼭 1백 년이 되는 해였고,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도 1백 년이 되는 해였다. 왜냐하면 조선교구는 설정과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중적으로 뜻깊은 해를 맞이하게 된 한국 교회는 그것이 지난날을 회고하고 앞날을 전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고, 파리외방전교회로서도 그간 맡은 바 임무를 다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당연한 기회로 판단되었다.

 

우선 신자수에서 한국 교회는 큰 발전을 보였다. 1백 년 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했을 때 6천 명에 불과했던 신자수는 그간 12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것도 실제로는 1백 년이 아니라 45년간의 결실이었다. 왜냐하면 1866년의 병인박해는 모든 것을 폐허화시켰기 때문에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방인 성직자 양성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첫째 목표이고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던 만큼 한국에서도 큰 성공으로 간수되었다. 실제로 그간 서울과 대구의 두 신학교에서 80여 명의 한국인 성직자가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 혜화동에 중등과정의 소신학교를 신설함으로써 해마다 일정수의 신학생을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성직자의 교육 수준을 향상시킬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업적에 대해 프랑스 선교사들은, 물론 그것은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찬양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며 그들의 한국 진출 1백 년이 자타가 축하할 만한 일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날의 그들의 업적에 도취되지 않고 오히려 앞날을 더 걱정하였다. 무엇보다도 개종 운동의 둔화는 교회의 앞날을 매우 어둡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은 첫째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란 정치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한편 교회가 격변하는 시대와 한국적인 특수한 상황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탓도 없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당국자들은 과거의 유산과 전통을 재검토하여 정리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쇄신과 적응으로 지속적인 복음화 방법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규모의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침내 최초의 한국 공의회를 계획하게 되었다.

 

물론 그간 성직자 회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복음화를 위한 지침서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미 1857년 한국 교회는 최초로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고 당장에 필요한 약간의 법령을 제정하였고, 30년 후인 1887년에는 그간의 한국 교회의 관습과 제도를 집대성하여 최초로 “한국 교회 지도서”를 간행했었다. 그러나 그 후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할 · 독립됨에 따라 1914년에 대구교구가 먼저 교구 고유의 지도서를 발간했고, 이어 1923년에는 서울교구도 고유한 지도서를 내놓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도서들은 두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니 첫째는 그 내용과 방법이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 되어 적용과 쇄신이 시급해졌으며, 다음은 교구가 많아짐에 따라 이제는 교구들이 교육한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통일을 기할 필요가 더 요청되기에 이른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이러한 통일성은 그간 교구가 5개로 증가한데다 또 종전의 파리외방전교회를 위시하여 독일의 베네딕도회, 미국의 메리놀회 등 서로 국적이 다른 선교 단체도 3개나 되었으므로 더욱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의 쇄신과 적응, 그리고 통일성, 이 두 가지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국 공의회가 계획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한국 포교지까지 관할하던 주일 교황사절 무니(Edward Mooney) 대주교는 이 공의회를 9월 13일 종현 주교좌 성당에서 개최할 것을 선언하였는데, 7월 31 일자로 된 이 공문에서 그는 교황이 포교성성 장관을 통해 주일 교황사절에게 한국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보다 앞서 서울, 대구, 원산, 평양, 연길 등 다섯 교구장은 공의회를 위한 준비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프로그램 작성을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에게 위임했었다. 이 작업을 위해 드망즈 주교는 동경으로 교황사절을 방문하고, 그와 협의하여 프로그램을 완료하였고, 또 8월 10일에는 공의회의 성공을 위한 기도를 다섯 교구장이 공동 명의로 지시하게 되었다.

 

이어 의장인 교황사절을 위시하여 공의회에 참석할 6명의 교부(敎父) 명단(다섯 교구장과 서울의 라리보 보좌주교)과 함께 16명의 고문 명단이 밝혀졌다. 고문에는 전주 감목대리 김양홍(金洋洪), 대구, 원산, 연길의 부주교인 무세(mousset), 로트(Roth), 래프(Rapp),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장인 기낭(Guinand)과 줄리앙(Julien), 그리고 서울에서 이기준(李起俊)과 폴리(Polly), 원산에서 히머(Hiemer)와 담(Damm), 평양에서 취스홂(Chisholm), 클리어리(Cleary), 콜맨(Coleman), 연길의 싸일라이스(Zeileis), 그리고 만주에서 초대된 교회법학자인 아르뱅(Arvin)과 교황사절의 비서 허즐리(Husley) 등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각기 공의회의 의제에 따라 교회, 가톨릭 액션, 규율, 교회 재산, 교회 지도서 등 5개 분과에 배치되었으며 공의회의 전반 사무를 관장할 사무총장에는 드망즈 주교가 임명되었다.

 

공의회를 주재하기 위해 9월 11일에 내한한 교황사절 무니 대주교는 이튿날 예비 회의를 주재하고, 이어 13일에는 예정대로 종현 주교좌 성당에서 9시에 대례 미사를 집전함으로써 공의회를 성대하게 개회하였다. 그 후 회의는 9월 25일까지 전체회의와 특별회의로 나뉘어 개최되었는데, 위원회별 특별회의에서는 필요한 법령들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전체회의에서는 그것을 심의, 의결하였다. 이리하여 최종적으로 74조의 법령이 의결되었다. 공의회는 한국 79위 복자 축일인 9월 26일 교황사절의 장엄미사로 폐회되었다.

 

공의회에서 의결된 법령들은 최종적으로 교황의 재가를 거쳐 1932년 3월 15일 포교성성 장관이 이를 승인하였고, 동년 6월 26일에는 교황사절이 그것을 한국교회 법령으로 반포하였다.

 

이로써 공의회는 끝났다. 그러나 실제적인 일은 이제부터였다. 왜냐하면 공의회는 5개 위원회(교리, 가톨릭 액션, 규율, 교회 재산, 지도서 편찬)를 신설하여 해당 분야에서 진취적인 일을 계속하도록 위임하였고, 특히 통일된 지도서(Dire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와 교리서(Catechismus communis missionum Coreae)의 편찬을 위해서는 그것을 공의회 법령에서 구체적으로 명시까지 했었기 때문이다(지도서는 2조, 교리서는 7조 참조).

 

이리하여 우선 한국 교회에 공통된 지도서의 편찬 작업이 지도서 편찬위원회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드망즈 주교였고 위원으로서는 대구의 줄리앙과 연길의 싸일라이스 두 신부가 그를 도왔다. 서울에서 1932년 2월 15일부터 3월 2일까지 열린 편찬회의는 25회의 회의를 거쳐 지도서의 편찬을 마무리지었다. 이 지도서는 그 후 교황청의 재가를 거쳐 홍콩에서 인쇄되기에 이르렀는데, 한국 교회의 다섯 교구장은 공의회 만 1주년이 되는 1932년 9월 26일을 기해 이를 공포하였다.

 

새 교리서의 편찬은 l백주년을 기해 발족한 ‘교리문답개정 5교구 위원회’가 그 일을 담당하였다. 위원장은 드망즈 주교, 위원은 서울의 윤형중, 평양의 양기섭과 스위니(Sweeney), 원산의 로머(Romer), 연길의 퀴겔겐(Kiigelgen) 신부 등이었다.

 

제1차 회의는 대구에서 1932년 9월 20일부터 10일간 열렸다. 여기서 각 교구에서 보낸 초안이 심의되고, 다시 새로운 초안이 작성되어 전문가와 실무자들에게 보내져 검토하게 하였다. 그 결과가 1933년(3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심의되었고, 심의 · 결정된 것을 드망즈 주교에게 라틴어로 옮기게 하였다. 이 라틴어 본문은 동년 10월(3~8일) 덕원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심의를 거쳐 본문으로 확정되었다. 다음해(2월 3일) 서울에서 열린 편찬위원회는 라틴어 본문으로부터의 한글역을 심의하고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새 교리서, 즉 “천주교 요리문답”은 1934년에 간행될 수 있었는데, 드망즈 주교가 작성한 라틴어 원문 교리서도 선교사를 위해 동시에 간행되었다. 라틴어를 한글로 옮기는 데는 마땅한 신학용어를 찾기가 어려워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교리서는 구교리서(성교요리문답)에 비해 내용이나 용어에 있어서 크게 발전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밖에도 1백주년을 기념하는 또 몇 가지 주요한 행사와 사업이 있었는데, 먼저 행사로서는 축하식과 기념 강연회가 있었다. 축하식과 강연회는 공의회가 폐막되기 전날 즉 9월 26일 복자 축일에 거행되었는데, 경성교구 청년회 연합회가 주최한 축하식은 경비 부족으로 조촐한 편이었다. 그리고 강연회는 한국인을 위해서는 공회당에서, 일본인을 위해서는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에서, 그렇게 두 번 있었는데, 연사는 드망즈 주교였다.

 

기념사업으로서는 전시회,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의 천묘(遷墓), 기념 병원의 설립 등 세 가지가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서울교구 당국에서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조선 천주교 사료전시회’를 계획하고 청구학회(靑丘i學會)의 후원을 요청하는 한편, 사학자이고 당시 경성 공립중학교 교사인 야마구찌(山口正之) 씨에게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학회에서는 그것이 교회를 위한 가장 의의가 있는 계획일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시의에 적합한 계획으로 판단하고 서울교구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0여 일 만에 준비를 서둘러 완료하고 축하 당일인 9월 26일과 27일 양일간 종현 수녀원의 장소를 빌어 ‘조선천주교사료의전관’(展觀)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총 38점의 전시품은 포교, 순교, 박해, 유물의 4개 부문으로 나뉘어 전시되었는데, 포교 부문에는 공과와 문답, 한불자전 등 12점, 순교 부문에는 가백서(假帛書)와 기해일기 등 9점, 박해 부문에는 포도청 등록과 척사윤음 등 12점, 유물 부문에는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 소장인 황금제 십자가와 묵주 등 5점 등이었다. 모두 천주교 사료로서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의 유물로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닐 만한 것들이었다. 특히 가백서나 황금제 십자가는 이미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던 도중 내몽고(內蒙古)의 서만자(西灣子) 부근 펠리쿠(혹은 馬架子)란 교우촌에서 병사함으로써 그곳에 묻혔었다. 그래서 서울교구에서는 그가 초대교구장인 만큼 l백주년을 기해 그 유해를 옮기는 것이 매우 의미있다고 판단하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이장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만주 봉천교구의 협조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봉천을 거쳐 1931년 9월 24일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유해는 다시 입관하여 종현성당에 모셔졌다가 10월 15일 서울교구장 뮈뗄 주교에 의해 장엄한 연미사가 거행된 후 자동차 상여로 용산까지 행렬, 마침내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끝으로 기념 병원의 설립은 경성교구 청년회 연합회에서 발기했던 것인데(1931년 6월 14일) 다행히 서울교구 당국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5년 만에 성모병원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백주년은 기념행사, 특히 기념사업에 있어서 오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만큼 주요한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 해는 한국 교회사에서 오늘에 그치지 않고 길이 기억되어 마땅할 것이다.

 

[경향잡지, 1988년 10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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