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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교회사6: 파리 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와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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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6 ㅣ No.378

한국 교회사 (6) 파리 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와의 갈등

 

 

뮈뗄 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는 독일의 베네딕도회와 미국의 메리놀회가 진출하게 된다. 베네딕도회는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두 수도회를 미묘한 관계에 놓이게 하고, 두 수도회의 이러한 갈등은 한국 교회에도 커다란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한국 교회는 1920년대에 와서 원산, 평양, 연길 등 잇따라 세 교구의 창설을 보게 됨으로써 특히 교회 조직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때까지 한국에는 서울과 대구의 두 교구뿐이었고, 또 이들 교구의 사목을 담당하던 선교사들도 프랑스 출신의 파리 외방 전교회 회원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원산과 평양 등 새 교구의 사목을 담당하기 위해 독일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새로 그 지역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때까지 가장 낙후되어 있던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에서의 집중적인 선교와 사목이 가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와 미국의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새로운 진출은, 그때까지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상의 독점을 지양하고 동시에 선교와 사목 면에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성과를 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의 앞날을 위해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베네딕도 회원은 원산교구의 사목을 담당하기 위해 한국에 새로 진출한 것은 아니었고, 수도원의 건설과 교육사업을 위해 이미 오래 전부터 서울에 진출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원산 진출은 교구 사목 면에서는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서울 철수는 수도생활과 교육사업 면에서는 도리어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서울교구의 뮈뗄 주교는 교회 학교의 교사난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 고유의 사범학교를 세워 단독으로 가톨릭 교사를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그 어려운 사업을 맡아줄 수도회를 물색하기 위해 1908년에 유럽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려나 그는 가는 곳마다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고,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 주저하고 있던 독일의 베네딕도회에서 뜻밖에 뮈뗄 주교의 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회원들의 한국 진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발대로 파견된 사우어(Sauer, 辛) 신부 일행은 1909년 초(2.25) 서울에 도착, 즉시 필요한 대지를 물색한 끝에 동소문 근처 백동(栢洞, 현 혜화동) 언덕에 위치한 광활한 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어 그들은 수도원 건설에 착수하는 동시에 학교의 건설도 병행시켰다. 수도원의 건설은 건축이 진행되고 또 인원이 보강되면서 제도적으로 완성되어 갔다. 1909년 말 또 두 명의 신부와 네 명의 수사가 도착하였고, 수도원도 장상수도원(長上修道院, Prior conventualis, 12월 13일자)으로 인정되었으며, 이듬해 7월에는 임시 수도원 건물을 마련하였다. 1911년 2월에는 독일 본원의 대수도원 총장의 방한을 계기로 또다시 두 명의 신부와 다섯 명의 수사가 도착함으로써 수도원의 인원은 크게 보강되었다. 노르베르트 베버(N. Weber) 총장은 4개월간 한국에 머무르면서 서울의 베네딕도 수도원의 수도자들을 격려하고, 또 한국의 문화와 역사도 돌아보았으며 귀국해서는 한국에서 견문한 것을 정리하여 유명한 “조선”(im Lande der Morgenstille)이란 책을 펴내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까지도 유럽에 널리 소개하였다. 1911년 7월에는 수도원 성당, 이어 9월에는 수도원 본관 3층 건물이 완공되었고, 1913년(5.15)에는 마침내 대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됨으로써 서울의 분도수도원은 한국에서 그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한편 초대 대수도원장으로 임명된 사우어 신부는 독일의 모원으로 가서 아빠스(Abbas)로 성성된(1913.6.8) 후 두 명의 신부를 대동하고, 그해 12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서울 수도원에는 21명의 수도자들(신부 9aud, 수사 12명)이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울의 분도수도원에서는 교육사업으로 수도원 구내에 두 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즉 실업 교육을 위한 숭공학교(崇工學敎)와 사범교육을 위한 숭신학교(崇信學敎)였다. 직업인의 양성, 특히 정직한 가톨릭 직공의 양성을 목적으로 1910년에 개교한 숭공학교는 또한 학생들의 실습을 위해 목공소와 철공소 등 여러 작업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학교는 해마다 놀랍게 발전하여 1914년에는 학생 수가 70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그 전망이 매우 밝았기 때문에 더 많은 학생을 받기 위해 증축까지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의 발발은 증축 계획을 포기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현상 유지마저도 급급하게 만들었다.

 

번성했던 숭공학교와는 달리 숭신학교는 처음부터 부진하였다. 1911년 9월 개교 시의 학생 수가 23명이었는데, 그나마도 1913년에는 17명으로 줄었고, 또 그해의 지원자도 4명에 불과하였다.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폐교의 직접 이유는 물론 지원자가 없어서였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일제가 교육을 독점하고, 특히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교육을 독점하려 한 식민지 정책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일본의 적성국이 됨으로써 서울의 분도수도원을 완전히 고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행이나 통신의 제한 등 독일인에 대한 일제의 통제 조처는 해마다 더 엄격해졌고, 마침내는 본국과의 서신 왕래조차 매우 어렵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끊기게 되니 수도원과 학교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조차 극히 어렵게 되었다. 일제는 심지어 숭공학교를 폐교할 것까지 요구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서울교구 당국의 협조로 그 명예를 빌어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다.

 

서울교구 내에서의 프랑스 선교사와 독일 선교사와의 관계는 양국간의 대적 관계로 더욱 미묘하였다. 1911년에 수도원 성당이 완공됨으로써 백동은 종현(현 명동)과 약현(현 중림동)에 이어 서울의 셋째 본당이 충분히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래서 백동의 수사 신부들은 주일이면 수도원 성당에 오는 인근 교우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주고, 강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수도원에서 강론을 하거나 예비자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따위의 전교 활동은 일체 금지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프랑스 선교사의 반수가 동원됨으로써 여러 곳에 공석본당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도 독일 선교사들의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수도원 내에서는 일부 수사 신부들이 한국의 다른 포교지를 맡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했었고, 그래서 사우어 아빠스는 뮈뗄 주교와 자주 그 문제를 의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뮈뗄 주교는 평안남북도를 맡도록 제의하였다. 그러나 사우어 아빠스는 함경남북도를 택하였다. 왜냐하면 평안도에는 프로테스탄트 교세가 강해서 경쟁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만주의 간도 지방을 포함한 함경남북도가 1920년(8.5) 서울교구에서 분할 독립되어 원산교구(정확히는 원산대목구)로 설정되었고, 동시에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에 그 사목이 위임되었으며 사우어 아빠스가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우어 아빠스는 1921년(5.1) 서울 종현 주교좌 성당에서 주교로 성성된 후 원산에 부임하여 원산을 임시 주교좌로 정하고, 우선 함경남도의 원산과 내평(內坪, 1930년 高山으로 이전), 간도의 용정(龍井), 삼원봉(三元峰), 조양하(朝陽河) 등 5개 본당에 본당신부들을 임명, 파견하였다.

 

원산은 이미 1887년에 본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우수는 2백 68명(일본인 10명 포함)에 불과하였고, 성당이나 사제관도 아주 초라하였다. 그래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우선 필요한 시설부터 갖추기로 하고, 서울 수도원 대지의 일부를 매각한 돈으로 학교와 사제관, 수녀원을 건설하는 한편 성당은 학교 강당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베네딕도회에서는 학교야말로 시민의 호응으로 포교의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사업에 큰 비중을 두었다. 과연 그들이 설립한 남녀 해성학교는 곧 명망을 얻었고 그래서 원산 지방의 복음 전파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5년에는 독일의 투칭(Tutjing)으로부터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원산에 진출함에 따라 선교와 교육사업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선교사의 수도 1922년에 14명이던 것이 3년 후에는 28명으로 배가되었다. 이에 따라 본당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1928년 연길교구가 분할 독립될 때까지 신설된 본당은 함경도에 3개(淸律, 會寧, 咸興), 간도에 6개(延吉, 和?, 大領洞, 輝春, 六道泡, 敦化)였다.

 

다음 서울의 수도원을 옮기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7년의 시일이 요구되었다. 이제 수도원은 수도 생활과 문화의 중심일 뿐더러 교구 사목의 중심이 되어야 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당, 신학교, 관리소, 농장, 정원, 작업장 등 필요한 시설을 할 수 있는 광대한 대지가 필요하였다. 그러한 대지가 다행히도 원산 교외 덕원(德源)에서 발견되었고 또 이름도 좋아서(德源, 덕의 원천) 수도원을 덕원수도원으로 명명하기로 하였다. 건축 공사는 1925년 서울교구로부터 백동의 대지 값을 지불받게 됨으로써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는데, 1926년의 정지 작업, 1927년 해빙과 함께 기초 공사에 착수, 그해 11월 중순까지는 이사가 가능할 정도로 수도원과 신학교 공사가 완공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11월 27일 서울 분도수도원의 남은 식구들은 근 20년간 정들었던 수도원과 하직, 서울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덕원의 새 수도원에 정착하였다. 신학생들도 수도원 옆의 신학교로 이사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덕원으로 이사할 때를 기다리면서 이미 1921년부터 구실업학교 기숙사 건물에서 신학생들을 양성했었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원산교구의 탄생으로 인한 베네딕도회의 서울 철수와 원산 진출은 교구 사목 면에서는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수도생활과 교육사업 면에서는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베네딕도회의 서울 철수는 한마디로 한국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서울의 베네딕도회의 철수로 그들이 경영하던 실업학교, 즉 숭공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실제로 1921년에 폐교되고 말았다. 그것이 왜 비단 베네딕도회만이 아니고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해 손실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를 오틸리엔의 베버 총장은 후일 이렇게 회고하였다. 한국의 개신교가 성공한 것은 그들의 교육과 사회 사업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톨릭은 그들과 경쟁하려면 이 분야에서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기존의 학교마저 없이 할 수는 없다. 숭공학교는 처음부터 평판이 좋았고, 한국 가톨릭의 명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하였다. 그러므로 이 학교가 폐교되면 결과적으로 가톨릭도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

 

서울의 철수 문제도 그러했다. 애당초 베네딕도 회원들은 서울을 철수한다 하더라도 서울에 최소한의 거점만은 남기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무조건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 후 베버 총장은 그들의 주장이 부당함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우리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간청에 못 이겨 서울에 왔다. 그 후 우리는 서울에 확고한 근거지를 마련하였고, 수도성소도 많지는 않았으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여 건설한 수도원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서울의 최소한의 거점이 필요함은 프랑스 선교사들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었다.” 사우어 아빠스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하였다.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우리는 서울에서 수도원도 계속하고, 학교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88년 6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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