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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첫 순교자의 신앙 고백 - 윤지충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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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09

[신앙 유산] 첫 순교자의 신앙 고백 : 윤지충의 수기

 

 

머리글

 

한국 천주교회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순교자는 누구인가? 어떤 이는 1785년에 체포되어 충청도의 동쪽 끝 단양(丹陽) 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은 김범우(金範禹) 토마스가 첫 순교자라고 한다. 김범우는 심문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고, 그 상처가 악화되어 유배지에 도착한 지 몇 주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훈이 북경의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나 김범우의 동생인 김현우의 중언을 보면 김범우는 1786년에 단양에서 죽었다. 그렇다면 김범우의 죽음에는 박해 때의 고문이 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의 죽음을 곧 직접적 순교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그의 죽음과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고문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순교자적 삶을 살았고 순교자처럼 고통을 무릅쓰고 신앙을 증거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형장(刑場)에서의 물리적 고통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를 한국교회사에 등장하는 좁은 의미의 순교자로 하기에 주저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사의 첫 순교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순교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을 들 수 있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였던 그들은 천주교를 굳게 신앙했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윤지충은 누구인가

 

윤지충은 해남 윤씨를 본관으로 하여 전라도 진산군 장구동(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대에 이곳에 자리잡은 이후 윤지충은 자신의 향리에서 학문을 익혔다. 그는 25세가 되던 1783년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했다. 그 다음 해인 1784년 겨울에 그는 서울에 올라가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천주교에 관한 책자를 보고 이를 빌려다가 베꼈다. 그 후 3년쯤 지난 뒤 그는 자신의 외사촌인 정약전(丁若銓)에게서 천주교를 구체적으로 배우고 이를 실천해 갔다.

 

그런데 윤지충을 비롯하여 초기 교회의 양반 출신 신도들은 보유론(補儒論)에 입각하여 천주교 신앙을 수용했다. 보유론은 천주교 신앙이 유교의 부족함을 보완해서 완전케 해줄 수 있다는 선교 이론으로서 여기에서는 조상 제사를 동양의 미풍 양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당시 중국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 사이에 중국의 조상 제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그것은 조상 제사가 미신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정적 견해였다. 이 때문에 중국 교회에서는 전례 논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중국 교회는 조상 제사를 금지하게 되었다.

 

천주교에서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한국 교회에 알려진 때는 1790년이었다. 이 조상 제사 금지령 때문에 정약전을 비롯한 많은 양반 출신들은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양반 신분의 상징인 사대 봉사(四代奉祀)의 관행을 포기하기보다는 신앙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 했다. 그리하여 윤지충은 조상의 신주를 불살랐고, 윤지충의 이러한 결단은 당시의 양반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1791년 윤지충의 어머니 권(權) 씨가 세상을 떠난 후 윤지충은 자신의 외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의논하여 모친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윤지충의 조상 제사에 대한 이러한 행동은 당시 성행하던 예학(禮學)에 관한 그의 독특한 견해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윤지충은 당색(黨色)으로는 남인(南人)에 속했다. 그런데 남인 양반들의 예론을 대변하는 인물로는 윤휴(尹?, 1617~1680년)를 들 수 있다. 윤휴는 예(禮)의 가변성(可變性)에 주목하였고 시대에 따라 모든 예는 변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했다. 반면에 당시의 지배층에 속했던 노론(老論)들은 예에 대해 이와는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노론 예학의 밑뿌리를 다진 이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이었다. 그는 예의 불변성(不變性)과 본질(本質)에 주목했다. 이 두 견해 가운데 남인의 예론에 젖어 있던 윤지충은 노론 지배층과는 달리 비교적 손쉽게 조상 제사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윤지충의 조상 제사 거부 행위는 당시 양반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윤지충은 “오래지 않아 가장 친하게 지내던 이들로부터는 불효자로 지목되었고, 이웃들로부터는 인성(人性)의 모든 감정을 배반한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그는 관가에 고발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에 대한 심문은 1791년 10월 26일 진산 관아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몇 차례에 걸친 심문 끝에 같은 해 11월 13일 오후 3시 33세의 나이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 그의 사촌 권상연도 곧 그의 뒤를 이어 참수되었다.

 

 

수기의 내용

 

윤지충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이 당한 심문 과정과 자신의 신앙을 기록한 일기를 남겼다. 윤지충이 남긴 기록은 “죄인지충일긔”라는 제명으로 필사되어 1801년 당시의 신도들에게까지 널리 읽히고 있었다. 또한 그의 이 기록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안에 프랑스 말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오늘의 우리는 그 수기의 원본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러나 달레의 책에서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윤지충은 이 수기에서 천주교가 충효(忠孝)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님을 역설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천주교의 떳떳한 윤리 규범으로 십계명을 내세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에 이어서 사람들을 죄로 유혹하는 일곱 가지의 원천과 그 유혹들을 극복하기 위한 일곱 가지의 방안으로 “칠극”(七克)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천주교에서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까닭을 설명하고자 했다. 즉 조상 제사 때 받들어 모시는 신주는 나무로 만든 것이고 부모나 조상의 영혼이 그러한 물질적 물건에 붙어 있을 수 없음을 말했다. 그리고 그는 위패에 술과 음식을 드리는 것의 부당함에 대해서도 밝혀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도 주무시는 동안에는 음식을 드리지 않는데 …… 죽음이라는 긴 잠이 든 분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거짓된 행동이요 헛된 일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상 제사를 폐기하여 “차라리 사대부에게 벌을 받을지언정 하느님께 죄를 얻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밝히며 일체의 우상숭배적 행위에 대한 거부를 선언했다. 윤지충의 수기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마무리

 

윤지충의 수기는 179l년에 일어난 신해 교난(辛亥敎難) 혹은 진산 사건(珍山事件)의 구체적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런데 신해 교난은 우리 나라 교회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신해 교난 이전의 교회는 보유론적 입장에 선 양반 지식층 중심의 교회였다. 그러나 조상 제사 문제를 빌미로 하여 일어난 이 사건 이후 조선의 교회에서는 자신의 신분상 특권을 스스로 부인하는 선각적 양반과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 부상되어 오던 민중들의 역할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보유론의 테두리 안에서 기존의 특권과 새로운 신앙을 접합시켜 보려던 시도는 이 신해 교난을 통하여 청산되었던 것이다.

 

윤지충의 죽음 이후 박해 시대 우리 교회는 민중 종교 운동의 양상을 띠며 전파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사의 전개 방향은 조선 후기 역사의 발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윤지충은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일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간 사람(epoch maker)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증언이나 수기의 가치도 한국 교회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선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오늘의 교회에서는 조상 제사를 허용하고 있다. 이는 오늘의 조상 제사에서는 지난날의 그것과는 달리 미신적 요소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굳은 믿음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올해는 그의 순교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해를 뜻깊게 맞이할 수 있는 방도는 과연 무엇일까? 올해의 12월 8일, 그의 순교일을 그냥 지나쳐서는 아니 되리라.

 

[경향잡지, 1991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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