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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1: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 폐단에 맞서 엄격한 수덕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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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32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1)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 폐단에 맞서 엄격한 수덕생활

 

 

- 파괴된 클뤼니 수도원 : 프랑스 동부에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위그노 및 프랑스 혁명 폭도들에 의해 거의 파괴되고 현재는 일부 벽과 기둥, 주춧돌만 남아있다.

 

 

영주제로 재편되는 중세 사회의 복잡한 발전과정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에 걸쳐 왕이나 세력가들은 자신의 세력유지 수단으로 성직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봉토를 사여 했다. 또한 당시 교육과 학문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으며 귀족 출신들이 성직에 대거 참여했다. 이처럼 높은 출신 성분과 교육 수준, 막대한 부를 지닌 고위 성직자들은 일찍부터 국가로부터 정치적 특권을 얻었다. 세금이 면제됐고, 치외법권이 허용됐으며 재판권까지 행사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시장, 화폐 제조권, 관세의 권리 같은 경제권마저 갖게 돼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완전히 제후화 됐다.

 

이렇게 교회가 봉건화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중세의 종교생활은 그 질이 떨어졌다. 주교나 수도원장이 제후를 겸직하는 상황이 교회의 종교적, 선교적, 문화적 사업을 쉽게 이행하게 하는 잇점도 있었지만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화시키는 어두운 면이 더 많았다.

 

과도한 궁정과 국가직무로 인해서 사목적 직무를 멀리하게 되고 제후로서 싸움터에도 나가야 했다. 교회 직위가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클수록 왕과 영주들은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했으며 교회법적 선출 대신 사사로운 임명을 공공연히 했다. 몇몇 영주들은 평신도를 주교나 수도원장에 임명했고 무자격자, 심지어 소년을 임명하기도 했다. 수도원장으로 임명된 평신도가 처자식을 거느리고 수도원 안으로 들어 올 정도였으니 그 폐해는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었다. 봉건제도 아래에서 성직자의 규율과 도덕은 해이해지고 신앙생활 수준은 크게 떨어졌으며 사회에는 미신이 팽배해졌다. 이런 가운데 교회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는 내부적으로 자기쇄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유능하고 개혁적인 교황들이 나와 교회의 위신과 권위를 높였다. 이와 같은 쇄신운동은 교회의 자주성 회복으로 이어졌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교황은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 황제와 분쟁을 겪어야 했고 이단과 이교와의 싸움을 해야 했다. 2세기 동안의 십자군 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0세기 말과 11세기 초의 교회쇄신운동은 산만하고 비조직적이었으나 11세기 초부터는 교회 개혁이 틀을 갖추고 13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교황권은 우위를 확보하게 됐고 교회는 스콜라 신학, 고딕 건축 등 중세문화의 중심이 됐다.

 

교회의 개혁에 가장 앞장 선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세상과 격리된 채 기도와 명상에 전념하던 수도사들의 공동체였으므로 정치적 세력 관계에 연루돼 있던 주교나 교구 성직자들과 달리 비교적 교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수도자와 수도원의 자각에서 기인한 이 교회쇄신운동은 종교적 윤리적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파급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이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의 성공비결은 수도원이 세속군주나 제후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데 있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아퀴타니아의 빌헬름 공작이 910년 부르군드 클뤼니에 세운 것이다. 9세기 교회의 쇠퇴가 수도원이 유력인사들에 예속된 탓이라는 자각을 가진 빌헬름은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세속이나 성직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했다.

 

클뤼니 수도원의 설립 승인장에는 첫째, 봉건적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신자들의 자유로운 희사로 하고 봉건적 의무를 지지않을 것이며 둘째, 수도원장의 선거권은 수도사가 가지며 셋째, 교황에 직속하고 고위성직자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며 넷째,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와 노동과 공동예배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당할 것 등이 명시돼있어 강렬한 개혁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로써 클뤼니 수도원의 책임자는 회원들이 선출했으며 교황 이외의 어떤 세력자들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았다. 비록 왕이라해도 수도원을 해산시킬 수 없었으며 수도원의 토지는 봉토가 아니었으므로 몰수 할 수 없었다.

 

바깥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된 클뤼니의 수도사들은 베네딕도 규칙서를 엄수하며 침묵 가운데 엄격한 수덕생활을 영위했다. 기도를 통한 다른 수도원들과의 형제적 단결, 전례를 통한 그리스도교회와의 강한 공동체적 유대는 중세 유럽 그리스도교 생활의 심화를 이끌어 냈다.

 

교회의 본질적인 힘인 영적 생명력을 통해 교회의 쇄신을 내부로부터 촉진시킨 클뤼니 수도원은 훌륭한 수도원장들로 인해 더욱 강력한 개혁의 힘을 발휘했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성 베르노, 성 오도, 성 아이마르, 성 마졸로, 성 오딜로, 가경자 베드로 등 탁월한 성인 원장들은 클뤼니 수도원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 결과 성 오딜로 원장 시절(994~1048년)에는 클뤼니 수도원에 속한 수도원이 2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클뤼니 수도원의 경건함은 프랑스, 부르고뉴,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으로 보급됐고 교회생활뿐 아니라 중세사회 전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클뤼니 수도원은 당시 서구의 종교적 심장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중요성은 이후 교황직과 결합하여 성직매매와 사제의 결혼 등 교회의 폐단과 투쟁하는데 있어 촉매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한다.

 

뛰어난 기도생활과 수행생활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클뤼니 수도회가 쇄신을 염두에 두면서 교회의 본질적인 것을 성찰한 후 그것에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덧붙여 클뤼니의 개혁이 짧은 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봉건제도 속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교회로부터 진정으로 원하는 것, 기도와 경건한 삶에 대한 목마름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현대의 생활이 복잡해진 만큼 교회가 해야할 일도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진정으로 필요한 것, 신자들이 목말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옛날의 지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3월,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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