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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신앙의 선조들과 십자성호 - 신자로서의 자부심과 열절한 신앙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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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4-13 ㅣ No.107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신앙의 선조들과 십자성호

 

신자로서의 자부심과 열절한 신앙의 상징

 

 

십자가는 그리스도교를 나타내는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상징이다. 원래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던 잔인한 도구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이제 십자가는 형벌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영원한 희망과 구원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초기교회 이래 신도들은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를 기억하면서 이를 그들의 표징으로 삼았다. 그들은 손으로 십자가 모양을 긋는 외적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교의 십자성호 긋기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의 신도들도 이 전통을 이어받아 실천해 갔다.

 

 

십자성호의 유래

 

신도들은 십자성호를 그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다짐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십자성호는 흔히 미사 가운데 복음 낭독을 시작하면서 이마와 가슴과 입술에 표시하는 ‘작은 십자성호’가 있다. 이와 함께 미사나 기도의 시작과 끝에 손을 들어 이마와 가슴과 양쪽 어깨 끝에 손으로 표시하는 ‘큰 십자성호’도 있다. 사람이나 물건을 축복할 때 그 대상을 향하여 손으로 크게 십자를 긋는 ‘축복의 십자성호’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자성호가 교회의 전례 안에 들어온 시기는 대략 서기 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큰 십자성호’는 서기 5세기경부터 나타났다. 이때는 오늘날 그리스 정교회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를 긋는 손이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넘어가는 형식이었다. 그러다가 13세기경에 이르러 로마 전례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손을 넘기는 십자성호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엽 이래 우리나라 교회에 전래되었을 십자성호도 바로 이 라틴식 십자성호였다.

 

우리나라 교회의 창설자 가운데 하나인 이승훈은 1784년 중국 북경의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아마 이때 ‘큰 십자성호’를 긋는 정확한 방법을 교육받았고 이를 조선에 전했으리라 여겨진다. 물론 그는 북당에서 미사에 참례할 때도 작은 십자성호를 그으며 복음을 경청했을 터였고, 그곳의 성직자들로부터 축복의 십자성호를 받았을 것이다. 이승훈이 학습하고 체험해서 이를 전해준 뒤 조선 신도들도 그들의 십자성호로 신앙집회를 시작하였다. 성직자가 입국한 이후 숨어서 지내던 미사성제도 십자성호로 시작하고 마무리하였다.

 

초기교회의 신자들이 십자가를 그으며 암송했을 ‘성호경’은 1801년의 박해에 관한 기록인 “사학징의”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박해 당시 신자들에게서 압수했던 책자 가운데 ‘예수 성호’ 또는 ‘성 예수성호’와 같은 기도문과 함께 한문으로 된 ‘성호경’도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기도문들은 오늘의 성호경과 다름없는 내용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당시의 신도들은 중국에서 전래된 한문 교리서에 이미 수록되어 있던 성호경을 알고 있었고, 이를 전례생활에서 실천했다.

 

박해시대 교회의 기도문에는 성호경이 반드시 들어있었다. 당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이끌던 가장 기초적인 기도서는 “십이단”이었다. 이 십이단의 열두 가지 기도문 가운데 첫째가 성호경이었다. 1838년경에 범세형 앵베르 주교가 편찬하기 시작하여 1862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천주성교공과”의 첫째 권에도 이 ‘성호경’은 들어 있었다. 이때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이다. 아멘.”으로 봉독되었다. 그 뒤 한 차례 더 변경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러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문구로 확정된 기도문을 쓰고 있다.

 

 

신앙 현장의 성호경

 

박해시대 십자성호는 그리스도교 신도로서의 자부심과 열절한 신앙을 상징했다. 1801년의 박해 때 일이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사형장에 끌려가 목에 칼을 빗맞고도 그는 벌떡 일어나 보란 듯이 크게 십자성호를 긋고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조용히 망나니의 칼을 받았다. 정약종은 죽음을 앞에 두고 십자성호를 그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누어 지려던 결의를 이렇게 행동으로 드러냈다.

 

같은 시기에 순교한 강완숙 골룸바도 십자성호를 긋고 머리를 망나니에게 드리웠다. 강완숙은 죽음의 마당에서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스승 예수의 길을 기꺼이 따라갈 수 있었다. 이렇듯 십자성호는 죽음을 앞둔 순교자들의 마지막 실천적 신심행위였다. 그들은 평소에 십자성호로 기도와 미사를 마무리했고, 죽음의 마당에서도 하느님께 드리는 희생의 미사를 십자성호로 귀결 지으며 자신을 봉헌하는 제사에 감사했다.

 

십자성호는 또한 선교사와 신도를 연결시켜 주던 끈이었다. 선교사를 조선으로 인도하던 중국인 신자들이나 이를 맞으러 나온 조선인 신도들은 십자성호를 통해 서로 접선할 수 있었다. 십자성호는 중국에서 돌아온 김대건이나 최양업 신부를 생면부지의 조선 신자들과 접선시켜 주었다. 1856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베르뇌 주교 일행은 바닷길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가 남긴 당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작은 배 한 척이 우리에게로 향하여 오며 선원들이 손을 하늘에 올리고 십자성호를 많이 그으며 우리 신호에 응답했다. 과연 그들은 신자들이었다.”

 

십자성호는 신자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한 표징이기도 했다. 1839년의 박해 이후 뿔뿔이 헤어졌던 신자들이 십자성호를 연결 끈으로 하여 서로 만나 마음을 트고 지내게 된 광경을 다블뤼 신부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박해로 인해… 다른 신자들과 연락을 할 수 없었던 신자 몇몇의 이야기를 최근 들었다. 이 고립상태에 실망한 나머지, 그중의 한 사람은 신자를 찾아 행상이나 거지로 변장하고 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거나 동냥을 했다. 그 사람은 동냥을 받으면서 성호를 긋곤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노력을 축복하시어 한번은 그가 신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신자는 그가 성호를 긋는 것을 알아보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들은 서로 신자인 것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계속하여 연락을 취할 수가 있게 되었다.”

 

 

남은 말

 

5세기경에 교회의 전례 안에 자리 잡은 십자성호는 18세기 말엽 이후 우리나라의 신도들에게도 전래되었다. 그들은 십자성호를 그리스도 신자인 자신의 표징으로 삼았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결의의 다짐으로 성호경을 바쳤다. 박해시대 십자성호는 신도임을 확인시켜 주는 접선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십자성호는 고통 중에 있던 신도들을 하나로 엮어 서로의 띳앗[兄弟愛]을 확인시켜 주던 표징이었다. 이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는 21세기 한국의 신도들도 십자성호를 통해 우리 교회의 전통을 확인하고 신앙인으로서의 다짐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5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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