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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조선 땅을 감싸 안은 성모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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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39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조선 땅을 감싸 안은 성모의 일생

 

 

한국교회사에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찾아볼 수 있다.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嚴父慈母]를 말하던 박해시대의 우리 전통문화는 가톨릭의 성모 신심을 쉽게 이해하게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선교에 종사하던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성모의 상을 구체화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조선교회는 각 지역마다 성모의 각기 다른 면모들을 묵상해 가면서 교회의 전통을 이룩해 나갔다.

 

 

선교사의 성모 신심

 

조선인 천주교 신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모 신심은 조선교구가 설정된 이후 더욱 강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남다른 성모 신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우리 문화 안에 성모 신심을 만개시켰다. 당시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모 신심의 예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통해서 먼저 확인된다. 그는 1831년 조선교구가 창설된 직후 제1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기 직전에 병사했지만, 날마다 '보통 묵주신공', '칠고의 묵주신공' 등 여러 기도를 성모께 드렸던 신심 깊은 인물이었다.

 

한편, 1836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했던 모방 신부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동정 성모께서 우리와 사랑하는 조선 교우들을 어머니다운 보호로 덮어 거두어주시기"를 기원하는 서원 미사를 요청했었다.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는 1837년 조선에 입국하려고 만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특별히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을 택하여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일정을 시작했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 조선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는 은혜를 기원했기 때문이었다.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했던 당시 조선교구는 중국의 북경교구와 동일하게 성 요셉을 주보, 곧 수호자로 받들고 있었다. 그러나 앵베르 주교는 조선교구의 새로운 주보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모시고자 했다. 그의 이 청원에 대해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도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회의 공동 주보로 모시도록 허가했다. 그의 돈독한 성모 신심은 조선교구의 주보를 결정하는 데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또한 페레올 주교가 사목하던 1846년 충남 공주의 수리치골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했다. 성모 성심 신심은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순결한 사랑에 대한 신심을 말한다. 성모 성심회는 마리아의 마음을 정성으로 공경하고 성모의 전구로 하느님께 죄인들의 회개를 청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원래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1805년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리고 성모 성심회는 1836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된 최신의 신심단체였다.

 

 

성모 신심이 반영된 사목 구역 이름

 

조선교구의 선교사들은 이후에도 성모 신심을 조선교회에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은 조선교구 안에 있는 사목 구역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일련의 명칭을 부여했다. 이 작업은 1861년 10월 조선교구의 베르뇌 주교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교구의 주보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하여 충청도의 상부 내포지방인 홍주, 곧 오늘날의 홍성 일대를 '성모 성탄 구역'으로 명명했다. 이 지역은 다블뤼 신부가 사목하던 지역이었다. 다블뤼 신부는 베르뇌 주교가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베르뇌 주교는 다블뤼 신부가 사목하던 지역에 성모 마리아의 일생에서 첫번째 사건에 해당되는 '탄생'이라는 명칭을 부여해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때 리델 신부는 충청도 진밭(공주군 사곡면 신영리)에서 선교하고 있었다. 리델 신부가 선교하던 지역은 '성모 자헌 구역'으로 명명되었다. '성모 자헌'은 마리아의 부모가 당시 유대교의 풍습에 따라 세 살된 성모 마리아를 성전에 봉헌했음을 기념하던 것이었다.

 

당시 조안노 신부도 충청도 공주와 그 인근 지역의 선교를 맡고 있었다. 그의 사목구는 '성모 영보 구역'으로 부르게 되었다. '성모 영보'는 동정녀 마리아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사실을 하느님이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계시한 사실을 말한다. 랑드르 신부는 둠벙이(공주군 신하면 조평리)에서 사목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목지는 '성모 왕고 구역'으로 불렀다. '성모 왕고'는 마리아가 세례자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을 찾아가 '마니피캇'을 노래했던 사실을 말한다.

 

한편, 칼래 신부는 경상도 서부지역을 맡고 있었는데 이 지역에는 '성모 취결례 구역'이란 명칭이 부여되었다. '성모 취결례'는 마리아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정결의식을 행하고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했던 일을 말한다. 그리고 페롱 신부가 선교했던 경상도 서북부 지방은 '성모 승천 구역'으로 명명되었다. 이는 마리아가 지상생활을 마친 후 그 영혼과 육신을 지닌 채 하늘의 영광으로 영입되었다는 신심의 표현이었다.

 

베르뇌 주교는 당시 조선에 입국했던 선교사들의 서열을 감안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일생과 관련되는 축일명을 사목구의 이름으로 부여해 준 듯하다. 곧, 1845년 조선에 입국했던 다블뤼 신부는 당시 선교사 가운데 제1위의 서열에 있었다. 그리고 1857년에 입국한 페롱 신부가 조선교구 선교사 서열 제2위였다. 이들의 사목구에 각각 '성모 성탄'과 '성모 승천'이라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서 중요한 두 축일의 명칭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선교사들은 1861년 같은 날에 입국했으므로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그 밖의 사건들에서 그 사목구의 이름을 취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조선 땅과 교회를 감싸 안게 되었다.

 

박해시대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마리아 신심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에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예를 들면,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대구교구가 분할되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을 관장하게 되었다. 제1대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되었던 드망즈 주교는 대구교구의 주보로 '루르드의 성모'를 모셨다.

 

교회는 1862년에 이르러 성모 마리아가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발현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뒤 1891년에 이르러 '루르드의 성모 축일'이 제정되었다. 드망즈 주교가 생존했던 시기 프랑스 교회에서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이 중요한 사실로 인식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서 성모 신심이 더욱 고양되어 갔다. 대구교구의 주보가 결정된 배경 가운데 하나로는 이러한 사실이 주목될 수 있다.

 

한편, 1953년 레지오 마리애 운동의 도입으로 개인 신심 차원에 머물러 있던 성모 신심은 대외적 활동력을 갖게 되었다.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은 골롬반회 선교사 헨리 주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성모 신심을 자신과 한국인 신자들에게 각인시켜 나갔다. 이 성모 신심은 한국교회의 내적 성숙과 외적 성장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경향잡지, 2001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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