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나가사키의 조선인 교회 400주년 (상) 로렌소교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1 ㅣ No.826

나가사키의 조선인 교회 400주년 (상) 로렌소교회


조선인 신자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

 

 

일본 나가사키의 조선인 교회로 알려진 라우렌시오본당(이하 로렌소교회)이 오는 8월 10일 설립 400주년을 맞는다. 이날 이문희 대주교(전 대구대교구장)와 나가사키대교구장 다카미 미츠아키(高見三明) 대주교 등 두 나라 주교들은 당시 로렌소교회가 있던 자리에서 400주년 기념미사를 공동 집전한다. 로렌소교회 400주년을 앞두고, 이건숙 율리에타 수녀(예수성심시녀회, 나가사키 거주)의 글을 통해 로렌소교회 설립 경위와 그 의미, 당시 일본 내 조선인 신자들의 모습을 추적해 본다.

 

나가사키에 무슨 성지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가사키 순례를 하고 다시 오고 싶은 도시로 마음에 각인하고 돌아가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일본이 한국보다 신자 수가 적다는 이유 만으로, 나무의 잎만 무성한 것만 보고 뿌리에 대해서는 들여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235년 먼저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나가사키의 거리는 교회의 건물과 관계된 16개의 건물이 줄지어 있어 마치 신작로의 가로수처럼 서 있었다는 표현만 봐도 알 듯하다. 그래서 나가사키를 ‘일본의 로마’로 부르고 대축일이면 성체행렬과 복음성극을 하고 성가소리가 마을을 울리는, 생각만 해도 성스러운 그리스도의 도시였다. 이곳에 조선의 교회가 있어 오늘날 400년을 맞는다는 것은 눈물 나도록 가슴 저미게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고 오직 하늘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어느 후손이라도 알려야 그분들도 천상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무작위로 조선의 양민들을 포로로 끌고왔다. 그 수는 적게는 4~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을 일본 각지에 분산시켜 살게 하였고, 조선인 포로들은 어려움 중에도 비교적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였다.

 

규슈(九州) 지역에서는 나가사키(長崎)를 비롯하여 오무라(大村) 아리마(有馬) 고토(五島) 아마쿠사(天草) 히라도(平戶) 등 지역에 살게 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자 다이묘(大名, 영주)와 선교사의 보호를 받으며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594년 규슈지역에서만 2000명 이상, 1595년 규슈와 고토지방에 3000명이 넘는 조선인 신자가 있었다는 보고서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일본 전국 각지의 신자 수는 불분명하나 상당히 많은 수의 신자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선교사들이 보낸 조선인들에 대한 편지내용을 소개한다.

 

“올해 2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실로 이해력이 뛰어나고 하느님과 거룩한 신앙교리를 경청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나 의문이 있으면 질문을 하여 의문을 해결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이 칭찬을 합니다. 조선인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참가한 일본인들이 ‘조선인이 신앙을 받아들일 때 일본인과 다름없이 어떤 점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입니다”(1594년 10월, 규슈지역의 조선인에 관한 파시오 신부의 편지).

 

“올해 이곳 나가사키의 많은 조선인 어린이가 교리를 받았습니다, 그 수는 1300명을 넘었으며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지 2년이 되어 올해의 보고서를 보냅니다. 그들은 대단히 사랑이 많고 기쁘게 세례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신자 되었음을 대단한 위로로 삼아 고백의 성사를 희망합니다. 그들은 신속하게 일본어를 익혔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구의 도움 없이 고백성사를 볼 수 있습니다.

 

성금요일의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부 1명과 몇 명의 수사가 성당 문을 닫고 부활성야의 세례대를 준비하며 성당내부를 장식하는 일을 거의 끝내고 마지막 정리를 할 때였습니다. 성당 문 밖에서 큰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창문을 열고 누구인지 묻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장궤를 하고 지극히 겸손하게 ‘신부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조선인입니다. 우리는 포로이므로 내일 부활성야의 거룩한 행렬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죄의 용서를 받기를 청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순절 속죄의 열렬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1596년 12월,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좋은 성격과 품성을 지니고 있으며, 훌륭한 자질의 소유자들로 우수한 능력과 지성을 갖고 있으며 온화하고 순종하며 맑고 청아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이다”라고 그들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1595년 세례받은 조선인은 규슈와 고토지방에서만 3000명이 넘었다.

 

나가사키 이세마찌(伊勢町) 2-14번지에 있는 ‘고려교(高麗橋)’. 이 마을에 조선인들이 집단을 이루며 살았음을 증거해준다. 당시엔 조선인들을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다음은 나가사키의 로렌소교회에 대한 기록이다.

 

“이 도시에는 조선인 신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대단히 열심하였으므로 1610년 조선인 신자 단체가 조직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기부금과 모금으로 적절한 토지를 사들여 정비하며 그들만의 교회를 건설하였다. 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작고 소박한 건물이었다.

 

스페인의 순교자 로렌소(라우렌시오)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신 성당으로 축성식은 엄숙하고 더없이 성대하게 거행되어 많은 조선인과 초대받은 일본인들이 참석하였다. 그날은 조선인 신자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교회에 끊임없는 방문객이 계속 이어졌다. 일본인 신자들은 자신들의 형제 조선인들이 보여준 신심과 자애, 그리고 신앙으로 일치단결한 모범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가난함을 돌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그들의 수호성인 로렌소와 자신들의 영혼의 공덕을 위하여 이같이 거룩하게 자신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행하였다.

 

로렌소교회는 나가사키 부교 하세가와 곤로쿠(長谷川權六)의 명으로 1620년 2월 12일에 파괴되었다”(APT c-286 134v 1610년 年報, jasin.57.5v).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이들은 낯선 이국땅에 포로로 끌려왔지만 천한 신분과 가난함을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힘인 기부금과 모금으로 하느님의 집을 지었던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으로 내놓은 것과 흡사했다. 선조들의 신앙에 머리가 숙여진다. 축성식에서 루이스 세루케이라 주교(예수회)가 기둥에 기름을 바를 때 이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하느님의 자비로 주님을 아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이다.

 

이들은 신앙에 귀의한 뒤에는 복음에 충실했으며 하느님의 증거자로 목숨을 바치기까지 성령의 이끄심에 귀를 기울이는 충직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노예와 자유인이 함께 어울리고 다른 민족 사람들까지 어울리는 다국적 평등사상을 체험했으며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배워가기 시작하였다.

 

고려교와 맞닿아 있는 이세마찌 신사(神社). 이 자리에 나가사키의 조선인 교회인 로렌소성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가사키 이세마찌(伊勢町) 2-14번지에는 이세신사(伊勢宮神社)가 있고 신사와 맞닿은 다리가 있다. 그 다리기둥에는 ‘고려교(高麗橋)’라고 쓰여진 글씨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고려교로 명명한 것은 조선인들이 이 마을에 집단을 이루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당시는 조선인을 고려인이라 불렀다). 그러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들의 집단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세신사의 자리가 바로 조선인 교회의 자리일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614년 도쿠가와 막부는 전국적으로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선포한 후 교회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나가사키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교회가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정책적으로 절이나 신사를 지었다. 교회의 자취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 정책에 따라 1620년 2월 12일에 몇 개의 성당들은 파괴되었고, 이때 로렌소성당도 파괴되고 이후 이세신사가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흰옷을 즐겨 입고 조선말을 하던 이들이 주일이면 성당에 모여 삶의 아픔을 나누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돌아갔던 그곳을 찾을 수는 없을까? 400년 전의 ‘로렌소성당의 기록’은 있으나 장소까지 명시되지 않아 불분명한 상태다. 1300여 명이 드나들던 그곳에 ‘조선교회의 터’라는 비문 하나 세워드리지 못함이 이 땅에 사는 후손으로 죄송스럽다.

 

역사는 오늘 ‘없다’고 한 사실이 내일이면 ‘있다’는 것으로 바뀔 수 있다. 어느 문서 한 귀퉁이에서 조상들의 신앙공동체인 ‘로렌소교회 터에 관한 기록’ 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가톨릭신문, 2010년 7월 25일, 이 율리에타 수녀(예수성심시녀회)]



97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