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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한정흠과 김천애, 그리고 최여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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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06 ㅣ No.821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한정흠과 김천애, 그리고 최여겸

 

 

전라도 김제 출신으로 가난했던 한정흠 스타니슬라오(1756-1801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먼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유항검의 집에 거처하면서 그의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고, 유항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1801년 3월경에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었고, 전주로 압송되었습니다.

 

같은 감옥에 있던 최여겸 마티아, 김천애 안드레아와 함께 서로 용기를 북돋우었기에, 어떠한 형벌과 회유책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해 음력 5월 16일 세 사람은 동시에 조정의 명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고, 7월 13일 다시 형조에서 “해도로 압송하여 사형에 처하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예수를 삼가 받들었고, 역적 주가(주문모 신부)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요상에 첨례하였고, 더러운 물건들을 몰래 지니고 있었다. 사당을 허물어버리고 제사를 폐지했으며, 일찍이 천당 지옥에 가지 못했음을 오히려 한탄했고, 죽음을 삶처럼 보았다. 그릇된 도리로 많은 이를 유혹하였으니 이미 죽음을 면치 못하겠거늘, ‘예로부터 이단을 배척하면서 형벌을 가하고 죽이면서까지 금지시켰다는 따위의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방자하게 발악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결국 8월 26일(음력 7월 18일) 김제에서 45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김천애 안드레아(1760-1801년)는 유항검의 하인으로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용맹함을 지니고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유항검과 함께 체포된 그는 배교로써 목숨을 보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충실한 증거자인 한정흠, 최여겸과 같은 감옥에 있었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선고문에 “사교를 큰 도리이며 더없이 착한 행실이라고 여겨 여러 해 동안 깊게 믿었고, 이미 뼛속까지 사무쳤다.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인데, 어찌 마음을 고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원하여 죄를 범했으니, 오로지 빨리 죽기만을 원한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8월 27일(음력 7월 19일), 또는 8월 28일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41세 때입니다.

 

전라도 무장고을의 양반 출신인 최여겸 마티아(1763-1801년)는 25세의 나이에 윤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웠습니다. 열심히 신앙을 실천한 그는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치려는 갈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때인 1801년 4월 13일 처가가 있는 한산 고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체포된 교우들 가운데 그가 가르친 교우가 28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붉은 밧줄로 묶여 관장 앞에 끌려갔습니다. 관장은 그에게 주뢰질과 같은 심한 형벌들을 가하였고 몽둥이들이 부러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굽히지 않자 관장은 전라감사에게 보고했으며, 감사는 그를 무거운 칼을 씌워 무장으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용감하게 고문을 이겨낸 그는 4월 19일 전주로 보내졌는데, “나는 단 하나뿐인 참된 종교를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곤장 너덧 대와 몽둥이 찌르기 세 번을 받았습니다. 죽기 전에 팔순 노모를 한번만 볼 수 있다면 후회 없이 죽을 것이라는 그의 소망은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매질로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며칠 동안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희생 봉헌에 무엇인가 모자람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한정흠과 김천애를 만나면서, 모두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순교의 길이 탁 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향 무장마을로 보내진 그는 개갑장터(2004년 6월 전북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에서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38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 황사영은 백서(74행)에서 “한정흠과 최여겸 두 사람만이 성품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여 참수당해 순교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전주교구 고창성당과 전북 고창군은 공음면 석교리에 있는 개갑장터를 2014년까지 3단계에 걸쳐 ‘최여겸 마티아 순교터 성지조성 개발계획’을 세워 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1단계로 2009년 말까지 전체부지 14,814㎡ 가운데 이미 매입한 6,980㎡ 외 7,834㎡를 추가 매입하여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2단계로 2012년까지 순교현양탑과 최여겸 동상, 야외 제대, 대형 십자가 탑과 성모상 등 기본 조형물을 설치하며, 3단계로 2014년까지 산책로와 쉼터, 공원이 들어선다고 합니다.

 

지난해 고창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시복시성을 기원하며 고창성당에서 무장읍성, 개갑장터에 이르는 23km 구간을 도보로 순례했고, 올해도 지난 5월 2일 고창성당에서 순교지, 무장관아와 읍성에서 순교지, 공음면사무소에서 순교지까지 3개 코스로 나누어 도보 순례를 하였습니다.

 

세 분의 순교자들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받아들인 복음을 삶과 순교로써 증언하였습니다. 순교를 가능케 했던 그분들의 삶과 신앙을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개갑장터 성지가 순교자의 신앙을 느끼고 숨결을 느끼는 거룩한 장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경향잡지, 2010년 6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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