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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인모시기와 성인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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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인모시기와 성인되기 동양과 서양의 성인개념은 매우 다르다. 동양에서는 성인이 존경받는 사람, 완벽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하고, 서양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 사람을 말한다. 더욱이 동양의 성인 개념은 고대지향적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인물이 종교의식을 통해 성인으로 선언된다는 시복시성은 한국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라고 할 때 성인을 그냥 훌륭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렇듯 시복시성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부르던 성인이란 칭호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하는 기회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가톨릭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시복시성운동은 우리 사회에 또 하나 커다란 선교 선언이 될 수 있다. 복자성월을 순교자성월로 이러한 현양의 열기와 더불어 병인순교 가경자 26위 중 24위의 시복식이 있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거행된 시복식에는 5만여 명의 순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5백여 명의 한국 신자들, 2천 5백여 명의 프랑스 신자들이 참석했다. 시복선언이 끝나자 당시 서울대교구 김수환 대주교의 주례로 대례미사가 올려졌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새 복자들에게 경배한 후, 한국 24위의 순교자들을 신앙의 귀감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한국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0월 13일 대건중·고등학교 교정에서 서정길 대주교와 교구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합동축하미사를 거행했다.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시성운동은 전 교구에 한국인 교구장이 임명된 1971년 이후에야 추진되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교회는 19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해 이들의 신앙심을 본받으려는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서울교구를 중심으로 태동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후 다시 병오박해 100주년인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천주교순교자현양회가 발족되면서 시복시성운동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운동은 순교지 조사 보존, 순교자의 유물수집 등의 수준이었다. 1971년 주교회의에서는 한국순교복자 시성추진안을 접수하였고, 1976년 한국순교복자 전체 103위에 대한 시성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당시 시성추진위원장은 김남수 주교, 로마주재 시성수속 담당관은 로마에 유학 중이던 서울대교구 박준영 신부였다. 교황청에서는 1978년 시성청원서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심사에 들어갔다. 아버지 순교자의 시복시성운동 103위의 시성 이후 시복시성운동은 이벽을 비롯한 신앙선조들과 1801년의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이들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우리 교회사에서는 부자가 순교한 사례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정약종 및 정하상 부자와 같다. 이 두 명 모두 교회를 위해 큰일을 했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그런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아들 정하상은 시성되었고, 1801년 순교자인 아버지 정약종은 아직 시성되지 못한 형편이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유박해 전후 순교자의 시복시성을 추진하지 못했던 데에는 증빙사료 미정리 및 사료부족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 여러 교구에서는 이 누락된 분들을 위한 시성준비가 한창이다. 원래 시복조사는 후보자의 해당 교구에서 시작된다. 대구대교구에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들의 시복시성은 물론 대구대교구가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경상도지역에서 을해·정해박해 순교자를 찾아내고 이에 관한 증빙사료를 붙이는 일은 대구대교구의 몫이 되었다. 이에 당시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시복시성운동과 순교자현양사업 및 교구사 편찬사업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시작했다. 즉 1996년 이문희 대주교와 사제, 평신도 13명이 향후 2년간 교구의 순교록을 작성하기로 결정하면서 순교자현양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총재 이문희 대주교, 위원장 김경식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대구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다시 창립되었다. 2001년에는 영남지역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 전개를 목표로 각 본당별로 위원 한 명씩을 추천받아 순교자현양위원회를 재구성했다. 한편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는 영남교회사연구소의 시복시성역사분과위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8년 역사분과에서는 대구의 순교자 72명 가운데 사료가 확실한 23명의 행적을 담은 『대구의 순교자들』을 발행하고, 이어 증언사료집 『대구의 순교자들2』를 출간했다. 2001년에는 『대구순교자연구』를 발간하고, 매월 교구민들을 위한 논문 발표회를 열었다. 대구대교구 사제평의회는 1998년 을해·정해·병인박해 순교자 23명의 시복추진을 결의하고, 이문희 대주교는 이해 가을 제5회 ‘관덕정후원회원의 밤’ 미사에서 이를 공포했다. 이들 중 세례명이 없는 세 분 순교자는 이번 시복시성대상자에서 보류되고, 나머지 20인의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다. 출발 당시 우리 교구의 시복추진 주관자는 김경식 신부, 청원자는 구본식 신부였다. 현재에는 전국 교구들과 보조를 맞추며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관덕정 순교성지의 현 관장 여영환 신부는 한국순교성인들의 축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즉 우리가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과 그 동료들의 축일인 9월 20일을 축일로 지내는 일은 마땅하지만, 한국성인 본명을 가진 사람은 각기 해당 성인의 순교일을 찾아 본명축일로 기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성인공경을 우리의 삶에 좀더 가까이 연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우리 성인으로부터 모범을 취하고 격려받자는 우리의 요청인 시복시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세계인들이 우리에게 성인들의 구체적 삶을 제시해 달라고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내줄 수 있는지 깊이 질문하게 되는 9월이다.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9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0 3,12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