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교회사2: 대구교구의 탄생으로 인한 교회의 활성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4 ㅣ No.374

한국 교회사 (2) 대구교구의 탄생으로 인한 교회의 활성화

 

 

대구교구의 탄생은, 한일합방 이후 교세 둔화로 나타나는 교회의 시련과 수난에서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이 시기에, 대구교구 초대교구장으로 부임한 드망즈 주교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다.

 

 

대구교구의 탄생

 

“한일함방”은 이후 교회가 겪게 될 시련과 수난의 확실한 조짐이었고, 그것은 곧 교세의 둔화란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졌을 때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대구교구의 탄생이었다.

 

조선 교구장 뮈뗄 주교는 전국을 포함한 조선교구의 관할 구역이 너무 광범하고, 게다가 신자도 날로 증가되고 있기 때문에 조선교구에서 새 교구를 분할 독립시켜야 할 필요성을 포교성성과 외방 전교회의 파리 본부에 건의한 바 있었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교구의 분할로 더욱 풍성한 결실을 내게 하여, 하느님에게는 더욱 큰 영광을, 신자들에게는 더욱 많은 영적 도움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1911년 4월 8일자 교황 비오 10세의 소칙서를 통해 조선대목구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분할하여 대구대목구란 새 교구를 설정함을 공포하였다. 동시에 종래의 조선대목구는 그 이름을 서울대목구로 바꾸고 또 새 교구의 사목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한다고 하였으며, 이에 따라 동회 회원인 한국 선교사 드망즈(Florian Demange 安世華) 신부를 새 교구장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대구교구의 교세

 

새로 탄생한 대구교구의 교세는 신자가 2만 6천 4명, 본당이 18개, 공소가 3백 90개였다. 당시 한국 교회의 전체 교세는 신자가 7만 6천 8백 43명, 본당이 54개, 공소가 l천 37개였으므로 대구교구의 교세는 대략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것이다.

 

새 교구의 18개 본당의 소재지, 본당 신자수, 공소수는 이러하였다(공소수에는 본당도 포함된다)

 

 본당

 신자수

 공소수

 본당

 신자수

 공소수

대구

김천

가실

용평(영천)

부산

마산포

문산(진주)

북제주

남제주 

1,990

1,720

1,649

858

1,567

1,460

1,626

213

197 

11(새방골 등)

37(성주 등)

37(신나무골 등)

17(하양 등)

26(동래 등)

24(김해 등)

34(거제 등)

15(한림 등)

1(홍노) 

목포

계량(나주)

신성리(정읍)

수류(금산)

전주

어은동(진안)

나바위

되재(고산)

안대동(용안) 

805

336

1,376

2,271

2,715

2,117

1,791

2,060

1,253 

11(지도 등)

8(함평 등)

20(부안 등)

25(태인 등)

35(임실 등)

32(장수 등)

21(여산 등)

24(진산 등)

12(참열 등)

 

 

 

 

26,004 

390

 

 

다시 이것을 도별로 나누어 보면, 7개 본당과 신자가 l만 3천 5백 6명인 전북이 으뜸이고, 다음은 경북으로서 본당이 4개, 신자가 6천 4백 46명, 그 다음은 경남이 본당 3개와 신자가 4천 9백 25명이었다. 전남은 본당 2개에 신자는 l천 5백 43명에 불과해서 새 교구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

 

교육사업은 소규모였으나 학교는 꽤 많은 편이었다. 즉 34개교, 학생수는 640명이었다. 본당 별로 보면 김천과 전주가 각각 9개, 대구와 안대동이 각각 3개, 되재가 2개, 그리고 용편, 마산, 문산, 제주, 신성리, 수류, 어은동, 나바위 등이 각각 학교 하나씩을 운영하고 있었다.

 

 

드망즈 주교의 경력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당시 한국 선교사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외방 전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파리의 유명한 생 슐피스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한편 파리의 가톨릭 대학과 소르본 대학 철학과 수료 자격증까지 취득하였다. 그 후 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고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98년 사제로 서품된 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l0월 중순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몇 달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풍습을 익힌 후 최초의 임지인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너무 활약한 탓인지 건강이 나빠져서 6개월 만에 휴식이 필요해 서울 용산 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었다. 처음에 그는 라틴어와 신학 강의만을 담당했으나, 건강이 회복되면서 신학교 살림살이까지 맡게 되었고, 그렇게 신학교에서 6년을 지냈다. 방학 때면 시골 본당을 찾아가 동료 신부들을 도우며 사목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고 한다.

 

l906년 10월 “경향신문”의 창간이 결정되자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에서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문의 편집을 맡아보면서 미구에 “경향신문”을 굴지의 신문으로 키우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합방 후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마침내 “경향신문”이 폐간당하자 부득이 그는 그 후신인 “경향잡지”란 순 종교지의 편집 일을 계속 받아오게 되었으며, 그러는 동안 대구교구장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드망즈 주교는 6월 11일 서울 종현 대성당에서 아드라스(Adras)의 명의주교로 성성되었다. 성성식은 주교들과 서울교구의 거의 모든 신부들과 외교관, 그리고 수많은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는 6월 26일에 대구에 부임하여 교구 신부들과 신자 공동체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드망즈 주교의 활약

 

이제 드망즈 주교는 교구의 창설자로서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교구의 기초를 조성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난관에도 굴복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강한 의지와 높은 지능의 소유자였고, 뛰어난 조직가이가도 하였다. 또 “믿고 일하라”(Confide et labora)는 그의 사목지표가 말해 주듯이 그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대구에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우선 임시 숙소인 초라한 한옥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처음 맞는 주일인 7월 2일, 그는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나서 그 성당의 수호자인 루르드 성모에게, 만일 주교관과 신학교 등 교구의 기본 시설을 마련하게 해주신다면 주교관 구내 가장 아름다운 곳에 루르드의 동굴과 같은 동굴을 세워드리겠다는 서약을 공식으로 하였다. 성모님은 그의 이러한 청원을 들어주셨고, 드망즈 주교 또한 그의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때에 건설된 성모 동굴은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또 순례객들도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동굴 위에 새겨진 “무염시태에 대한 서약에서, 1911~1918”이라고 새겨진 글귀를 아직도 감격적으로 읽을 수 있다. 1911년은 서약의 해요, 1918년은 실현의 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모님께 서약을 끝낸 드망즈 주교는 사목 방문을 서둘렀다. 그에게 있어서 사목 방문만큼 더 좋은 선교 방법이 있을 수 없었고 또한 본당을 알고 교구를 아는 데 본당이나 본당신부로부터 직접 제공되는 정보보다 더 확실한 정보가 있을 수 없었다.

 

드망즈 주교의 최초의 사목 방문은 1911년 9월과 1912년 1월, 두 번에 걸쳐 실시되었다. 9월부터 실시된 방문에서 그는 전라도와 제주도를 방문하였는데, 9월 11일 고산 지방의 되재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바위, 안대동, 전주, 어은동, 수류, 신성리, 계량, 목포를 거쳐 제주도에 이르러 10월 23일에 공식 방문을 끝내고, 거가서 2주간의 휴식을 취한 후 11월 10일에 대구로 돌아왔다.

 

이듬해 1월에는 20일간에 걸쳐 경상도 지방을 방문했는데, 1월 5일 용평에서 시작하여 마산포, 문산, 부산, 김천 등지를 방문하고 1월 24일 대구로 돌아왔다.

 

 

교구 지도서 작성

 

최초의 교구 사목방문을 마치고 난 드망즈 주교는 그 직접적인 결론으로 교구 지도서의 작성이 가장 시급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즉 교구와 성직자를 위해 교구의 전통과 현실에 맞는 지침서를 만들어 교구의 기본 방침을 법으로 정착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쇄신과 개혁으로 인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드망즈 주교는 서둘러 직접 교구 지도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그것을 선교사와 한국인 신부들에게 보내 사전에 검토하게 한 후, 1912년 5월 사제 피정을 계기로 개최된 성직자 회의에서 마지막 토의와 표결을 거쳐 원문을 완성하여, 3월 25일 그 실시를 공포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1912년을 지도서의 해였다고 회고하였다. 실제로 교구지도서는 교구의 기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사제 피정은 그해 3월에 준공된 명도회관에서 열렸는데, 그것은 드망즈 주교가 신부들의 피정, 경리 사무실, 청년회 회의실 등을 위해 임시로 시급히 건축한 것이었다.

 

1913년은 드망즈 주교의 발과 같이 주교관 건축의 해였다. 건축은 다행히 기증받은 부지가 있어서 급속히 진행되어, 1913년 말에는 새 주교관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1914년은 신학교가 시작됨으로써 신학교의 해가 되었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은 외방 전교회의 기본 정신이요 전통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용산 신학교에서 6년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드망즈 주교에게는 특히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과 발전이 그의 숙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열망에서 그는 그 일을 용감히 추진하였고, 마침내 1914년 10월 3일 신학교를 개교하고 신입생 57명을 받아들였다. 향후 그는 여기서 43명의 사제를 길러냈다.

 

 

펑신도 사도직 육성을 위한 기여

 

드망즈 주교는 평신도 사도직의 육성을 위해 특히 공소회장과 젊은이들의 역할과 사명을 중시하였다. 그가 공소 발전에 진력한 이유는 본당이 18개인데 비해 공소는 무려 3백 74개나 되고 또 교구 전체 2만 7천 명의 신자 중 2만 2천 명이 공소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공소 교우들이 현지에서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강당의 건축을 권고하여 마지않았고, 그 결과 한 해 동안에 15개의 강당이 착공되거나 준공된 적도 있었다.

 

또 공소는 연중 3~4일간의 본당신부의 방문을 제외하면 오로지 공소회장이 맡아봐야 하므로 공소의 유지나 발전은 공소회장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 드망즈 주교는 공소회장들에 대한 교육의 일환으로 그들의 연례 피정을 의무화하는 동시에 1913년 2월 주교좌 성당에서 처음으로 회장 피정을 실시하였다. 이어 9월에는 회장 직책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회장의 본분”이란 책을 간행하여 그 규범에 따라 직책을 수행하게 하고 또 피정 때에는 그것을 교재로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청년들의 사도직을 위한 연구와 선교를 장려하기 위해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보다도 먼저 1912년 3월 그들에게 회관을 마련해 주었고, 이어 6월에는 이미 계산동에서 발족한 청년회를 명도회로 개편하고, 명도회와 명도회관을 중심으로 청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게 하였다.

 

한일합방은 새로 탄생한 대구교구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교구에 비하면 현저한 성과를 나타냈다. 비근한 예로 성인 영세자수가 서울교구에서는 1913년과 1914년 2년간 계속 감소되었으나, 대구교구에서는 계속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도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교구장을 위시하여 9명의 선교사가 한꺼번에 소집되어 교구를 떠나게 되니 그 타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경향잡지, 1988년 2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신부)]



99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