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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31: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 교회사 무대 북유럽으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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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22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31)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 교회사 무대 북유럽으로 확장

 

 

[독일=김상재 기자] 독일 여행의 백미라고 하는 라인강 여행이 시작되는 쾰른은 식민지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콜로니아가 독일어화한 말로 로마제국의 최북단 방어도시였다.

 

로마제국의 국경은 국가체제를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만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후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기점으로 하고 있었고 제국의 주력부대를 이곳에 수비군단으로 남겨 놓았다.

 

용맹한 게르만 민족의 남진을 제지하는 것이 로마제국의 가장 주된 국경 수비였던 것이다.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경계로 로마와 마주한 게르만족은 마을공동체로 살았으며 그들의 가장 큰 정치적 사회적 단위는 부족이었다. 또한 사회체제에서의 기본적 관계는 전사와 부족장과의 관계였는데 이는 이후 유럽전체를 게르만족이 지배하게 되면서 봉건제도를 이루는 바탕이 된다.

 

로마가 비록 제국을 게르만족으로부터 보호하는데 국방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지만 국경과 가장 근접한 게르만족은 로마문명과 친숙해졌다. 뿐만 아니라 4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로마의 큰 주에서 게르만인들이 노동자나 보충병으로 편입되기도 했고 심지어 정부에 의해 장려되기까지 해 5세기의 게르만 침략에 대한 방어의 많은 부분이 다른 게르만인들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다.

 

게르만족은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전투적 민족이었으며 일부일처제의 건전한 가족제도를 가졌던 까닭에 인구는 늘어만 갔고 식량은 모자라 먹을 것과 비옥한 땅을 찾아 로마제국 안으로 몰려들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요인과 군사적으로 약체화되고 내부적 혼란과 모순을 겪고 있었던 로마제국내부의 정치적 요인을 안고 있었다.

 

 

경과

 

200년간 진행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훈족의 서진으로 시작됐다.

 

그림에서 보듯이 2세기 중엽 동게르만 계의 서고트족은 다뉴브강 북안에, 동고트족은 동쪽 흑해 북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의 유목기마 민족이었던 훈족은 2세기경부터 서진을 시작, 375년 동고트족을 압박하여 이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에 놀란 서고트족은 376년 일부는 서쪽으로 도망하고 일부는 동로마 황제 발렌스의 허가를 얻어 다뉴브강 건너 트라키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민족대이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서고트인들에게 주어진 땅은 척박한 곳으로 살기 어려운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관헌들의 횡포가 심해 서고트족은 반란을 일으켜 378년 아드리아노플 싸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발렌스황제를 전사시켰다.

 

이 반란은 발렌스의 제위를 계승한 테오도시우스황제의 친게르만정책에 의해 잠정적으로 수습되었으나 그의 사망후 서고트인들은 약탈과 정복을 재개해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잇달아 침입, 마침내 410년 영원한 도시 로마를 함락시켰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정복에 자극되어 신국론을 저술하고 이 재앙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시키려 했다는 것을 볼 때 로마 함락의 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로 접근하자 서로마제국은 본토방위를 위해 라인강 국경의 수비군단을 소환하게 된다. 이때부터 라인강 유역의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제국 안으로 밀고 들어와 30년만에 고올, 스페인, 북아프리카 등지의 로마제국 영토를 점령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이미 막을 수 없게 되었다. 425년 이래 반달족이 스페인을 황폐화시켰고 429년에 이탈리아의 곡창이었던 북아프리카를 정복했다. 이때 히포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했다(430년). 훈족은 동고트족 정복 후에도 서진을 계속하여 452년에는 로마를 침입, 레오대교황의 담판으로 물러나기도 했으며 훈족의 쇠퇴 이후 동고트족이 476년 서로마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의 서부는 모두 게르만 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서고트족은 스페인에,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에, 프랑크족은 지금의 프랑스인 북쪽 갈리아에, 부르군드족은 남부 갈리아에,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에, 동고트족과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각각 왕국을 세우고 정착했다.

 

 

결과와 의의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교회사의 주요 무대를 지중해에서 북유럽으로 옮겨가게 했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제국의 서부에서는 제국의 권위가 실추됐고 반면 교회는 무너진 행정조직과 파괴된 공공시설, 황폐해진 학교 등의 혼란 속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남아 고대의 문화 정수를 보전하면서 새로운 역사 창조의 원동력으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신앙을 심화시켰다. 비록 당시 교회가 로마제국 안으로 들어와 제국의 제도를 변화시키고 교회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내면적으로는 아직도 신앙심이 깊지 못한 상태였다. 고대의 종교와 사상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상태에서 장기간에 걸친 침략으로 세속생활에 불안을 느낀 이들이 신앙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신앙과 노동의 결합을 보장해주는 수도원 생활이 서유럽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사회적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이다.

 

또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서로마 제국 멸망을 계기로 한 교회의 포교의식의 전환이다. 로마제국으로 침입해온 게르만족의 대부분은 아리우스파였다. 이미 몰락해 가는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 황제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레고리오교황을 비롯한 후계자들은 교회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게르만족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들을 정통신앙으로 교화시키고 문명화 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가톨릭교회와 게르만족의 동맹이 이뤄짐으로써 중세의 특징인 '그리스도교적으로 통일된 서구사회'라는 기틀을 놓게 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10월 14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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