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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5: 몸의 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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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24 ㅣ No.737

[몸의 신학] 몸의 속량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5)

 

 

시작하며

 

“여보, 미안해…. ‘7년 식물인간’ 아내 손을 놓다.” 4월 4일자 국내언론이 뽑은 제목입니다.

 

사연은 서른 살의 아내가 출산하다 식물인간 상태에 빠져 7년을 간호하며 기다리다 지쳐서 장인의 권고로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사표현이 불가능한’ 아내를 대신해 장인께서 몸소 피고가 되어주셨다는데, 관계자의 말입니다. “민법이 정한 이혼사유 중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에 해당한다. …친정 부모는 ‘고생한 사위를 그만 놓아줄 때가 됐다.’고 헤아렸던 것 같다.”

 

교황님께서 이 사연을 들으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먼저 참으로 딱한 사정을 깊이 위로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질문하시지 않을까?

 

“성인남녀간의 인격적 혼인의사로 이미 시작한 공동생활에서, 장인의 개입은 왜 필요합니까? 유효는 합니까? 새 혼인을 맺으려는 준비일진대, 그렇다면 혼인서약문에서처럼, 새 부인은 ‘아플 때나 병들 때나’ 평생 아끼고 사랑해 주겠습니까? 남편을 철석같이 믿고 ‘온전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혼인서약’의 의미는 나중에 소개하겠고, 부부간의 ‘온전한 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록 분량은 많지만, 이번 호에 약속드린 주제들, 욕망을 품고 바라봄, 몸을 단죄해 버리는 이론, 마음에 대한 의심, 에로스와 에토스, 몸의 속량을 통해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욕망을 품고 바라봄’의 의미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욕망{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교황님께서는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라는 첫째 부분에서는, 그 계명을 실천하는 가운데 팽배했던 결의론적 해석을 소개해 주시면서, 성조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간음이 다처와 축첩이 아니라 남의 아내에 대한 소유권 침범이었으며 남녀 모두를 사형에 처할 정도로 위중한 죄였고, 예수님께서도 그 점을 간음한 여인에게 명백히 확인시켜 주셨다고 보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욕망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라는 둘째 부분에서는, ‘능가하는 의로움’(마태 5,20)을 위해 구약의 결의론적인 해석과의 관련을 말끔히 끊어버리신 예수님께서 몸과 마음 모두가 포함되는 인간학적 기초 속에 선포해 주신 간음 금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에토스를 읽어내십니다. 그리고 비록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위 속에서 야훼-신랑의 사랑과 이스라엘-신부의 우상숭배를 통해 인격적 계약의 파괴 또는 인격적 배신으로서 간음의 의미도 읽어내시지만(에제 16,5-32; 호세 2,13-3,1), 간음이 명백히 ‘몸의 죄’이며 상징적으로나 합법적으로나 참된 몸의 결합은 아니라고 강조해 주십니다.

 

4월호에서 소개한 것처럼, 교황님에 따르면, ‘바라보는 그 사람’은 배우자이든 배우자가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그 모두가 해당되며, ‘한 몸’되는 부부관계를 지배-소유의 관계로 환원시켜 버리는 ‘욕정’을 ‘환원적인 욕망(reductive desire)’이라고 규정해 주심으로써, 그분은 ‘욕망’ 개념을 부가되는 ‘수식어’에 따라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욕정(concupiscence)’은 명백히 부정적인 개념인데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1요한 2,16)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욕정에 비견되는 ‘열정(aspiration)’은 외부적인 감각과 몸을 만족시키려다가 평화의 내적 원천에 도달하여 창작의 에너지가 되지 못한 채 ‘소진’ 또는 ‘마멸’되어 버리는 것(집회 23,16-22)이라고 보십니다.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에서 교황님의 관점은 돋보입니다. ‘존재를 따르는 행위자(operari sequitur esse)’인 인간이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자기 존재의 속성, 그리고 욕망의 ‘내적 사정’을 외부로 표현해 주며 그 시선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의 운명도 규정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녀를 간부로 만들었다.”는 과거의 번역을 계속 인용하십니다.

 

지혜전승에서도 남자의 시선에 따라 여자는 ‘죄의 기회’이며 ‘유혹자’(잠언 5,1-6; 6,24-29; 집회 26,9-12 참조)로도, ‘선과 미의 대상’(집회 26,13.15-18 참조)으로도 소개됩니다. 같은 원리로, 여자의 시선에 따라 남자의 처지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의 셋째 부분에서는, 마음으로 간음하려는 ‘의지’에 따라서 ‘품고 있는 욕망’의 윤리적 성격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고 보십니다.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자기 아내를 바라볼 배타적인 권리가 그 남자에게 있음을 인정한다면, ‘품은 욕망’은 남녀의 인격적 존엄성이 존중되는지, 그리고 부부일 때의 ‘정당한 욕망’과 부부가 아닐 때의 ‘부당한 욕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따라 도덕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음할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기 부인을 바라보는 남편은 자기 부인을 상대로 몸으로는 아닌 ‘마음으로’ 간음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한 몸’이 되지 않으려는 ‘간음의 시선’이 아닌, ‘부부다운 시선’으로 자기 배우자를 바라보며 품는 욕망은 부부만이 가지는 배타적이며 정당한 권리이기에 키워가야 할 그것입니다.

 

 

몸을 단죄해 버리는 이론

 

교황님에 따르면, 마니교는 성서 세계가 아닌, 조로아스터교적인 선신의 이원론에서 발원한 것인데, 물질과 몸을 악의 원천으로 보았고, 특히 성과 관련한 혼인과 부부생활도 모두 단죄해 버립니다.

 

복음서의 ‘자기 눈 뽑기’, ‘자기 손 자르기’, ‘마음으로 범한 간음’ 등에서도 몸과 그 지체들을 단죄해 버리는 마니교의 영향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사람 속에 들어있는 것까지 알고 계신 그분”(요한 2,25)께서는 오히려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몸이 정신을 현현하도록 불러주셨고 ‘한 몸’이 된 부부를 아무도 갈라놓아서는 안 될 정도의 불가해소성을 명백히 확인해 주셨습니다(마태 19,5-6). 결코 마니교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성경이 몸의 욕정을 ‘고발’한다고 해도, 극복하도록 ‘부르심’인 것이지 몸 자체를 단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음에 대한 의심들

 

교황님께서는 성서적인 표현(1요한 2,15-16)과 함께 인간 마음에 대해 ‘의심을 품은 대가들 (ma res du soupCon)’을 소개해 주시는데, 인간 마음에 대한 니체의 해석을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으로, 마르크스의 해석을 “눈의 욕정”으로, 프로이트의 해석을 “육의 욕정”으로 각각 요약해 주십니다. 그러나 몸에 욕망과 욕정이 있다고 해서 마음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 몸은 전체적으로 ‘속량’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로스와 에토스

 

교황님에 따르면, 신학적 철학적으로 칠십인역본에서 잘 알려진 단어 에토스(ethos)는 양심법과 마음의 민감성을 향한 의지와 주체에게 종속된 선악의 복합 영역들을 그 자체의 취지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성경에서 생소한 철학적 단어 에로스(eros)는 ‘진선미로 끌어당겨주는 내적 힘’입니다.

 

에로스는 통상 관능적인 본성이라 일컬어지지만, 창세기에서는 ‘한 몸이 되려는 상호 이끌림’으로, 복음서에서는 ‘욕망을 품은 시선’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에로스가 성숙하게 자발성을 발휘하는 데 에토스가 요구된다고 보십니다.

 

 

‘몸의 속량’의 의미

 

마음은 속량될 몸을 위한 에토스의 주체이며 인간과 세상을 속량시키는 에토스 그것의 주체입니다. 창세기의 ‘처음’은 바로 몸 속량의 에토스와 직결되어 있고 거기에는 육의 욕정을 통제해 줄 금욕과 절제가 요구되는데, 이는 자기 존엄성과 인격성을 발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몸이 속량되려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마음의 정결이 요구된다고 보십니다(갈라 5,16-17 참조).

 

 

마무리하며

 

서두에 소개된 사연에서, 이제 초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제대로 된 보호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데 모두 공감했답니다. ‘제대로 된 새 엄마’를 만들어주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새 엄마’가 아니라 ‘버려도 될 또 다른 엄마’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요? 불쌍하게 버려진 한 여인의 ‘부인’ 자리에 대신 앉게 될 여자는 ‘제대로 된 아내’가 아니라 ‘반쪽짜리 아내’는 아닐까요? 무거운 짐에 지친 남편과 과장된 죄책감에 짓눌린 장인께서 ‘합동으로’ 파랑새 꿈을 꾸시는 것은 아닐까요?

 

다음 호에서는 전반부를 넘어선 몸의 신학의 사상적 핵심 배경을 소개한 뒤, 몸과 마음으로 ‘성령을 따르는 정결’과 예술과 매체에서의 ‘몸의 에토스’에 대해 성찰하고자 합니다.

 

[경향잡지, 2010년 5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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