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강론자료

2012-1028...연중30주일...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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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10-27 ㅣ No.1322

연중 30 주일 (나해)

예레미야 31,7-9      히브리 5,1-6     마르코 10,46-52

2012. 10. 28. 등촌3

주제 :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자세

아직 겨울이라는 소리는 할 수 없지만, 겨울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분명한 나라라고는 합니다만, 날이 갈수록 아열대기후로 바뀌어간다고 걱정하는 것을 보면, 옛날에 배운 온대지방이라는 소리가 영원한 진리는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의 환경이 왜 이렇게 바뀔까하고 우리가 질문을 하고 원인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지지 않는 한 바뀔 수 없는 일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흔히 이렇게 하는 얘기의 결론에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은 합니다만, 그것이야 말로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쉽다고 하지 않는 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드러내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도 아주 먼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전교의 달, 마지막 주일, 연중28주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드러내는 자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는지 한번쯤은 생각했을, 전교의 달을 지내면서 신앙을 드러내려는 자세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생각해볼 때입니다.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들은 방법에는, 누군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을 향하여 있는 힘껏 소리치고, 그의 관심을 끌어 그가 내 삶을 한 순간에 돌려놓는 기적을 말하기 쉽지만, 그런 기적의 상황을 만나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기적의 순간을 찾는 것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 뜻을 품고 드러내는 기적의 순간들이 연속된 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말 그대로 기적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습을 늘 만날 수 있는 기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난, 바르티매오는 정말로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말 몇 마디소리치고, 천지개벽의 상황을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이 생기게 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아쉬움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막아대는 소리에 자신의 바람을 말하는 소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이라면, 자신이 드러내야 하는 것이라면 거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 삶에서 모두 다 똑같이 본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소리만 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 또한 세상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삶에서 좋은 상황을 만나려면 끊임없이 준비해야합니다. 상황을 찾아야 합니다. 좋은 순간은 내 삶에 저절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압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물론 내가 정말로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이루고 싶다는 자세가 앞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소리는 바르티매오에게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소리를 듣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기의 삶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어떤 준비를 하고 사는지 살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정말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자세를 모두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에는 왜곡도 있고 싸움과 불화도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드러내는 자세가 모두 다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정말로 올바른 사람이라야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민족의 앞날이 어수선하고 유배생활에 빠져 침울해있던 유대민족에게, 예레미야 예언자는 희망의 소리를 선포했습니다만, 그 희망의 소리가 실현된 세상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고 난 다음에서야 찾아옵니다. 예언자의 기도도 실현되지 않았다고 알게 된 사람이 내가 누리지도 못할 세상이니 나는 내 후손을 위해서 아무 것도 청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에는 긍정의 대답도 있고 부정의 대답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는 말 그대로 우리의 선택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본당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으로 삽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제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힘들어하면서도 제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느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신앙을 드러내며 뭔가를 봉헌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당돌하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선택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리와 뜻을 알아들은 사람이 좋은 곳을 향해서 다가오기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를 마음껏 누린 사람이 훗날 하느님을 향하여 자기 삶을 드러내는 때가 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바르티매오가 소리쳤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라면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한 선물로 바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선물은 입으로만 외우는 기도이어도 충분할까요? 아니면 하느님에게서 받은 시간을 올바른 삶의 결실로 바꿔서 봉헌하는 일도 포함할까요?

 

대답이 힘든 질문일수록, 그 대답에는 정성을 담아야 할 일입니다. 나는 어떤 정성을 갖춘 사람으로 이 순간을 지내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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