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강론자료

2012-0917,,,월...사람이 드러내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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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09-16 ㅣ No.1308

연중 24 주간 월요일 - 짝수 해 1코린토 11,17-26.33       루카 7,1-10

 

2012. 9. 17. 등촌3

주제 : 사람이 드러내는 자세

사람의 삶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드러납니다. 그저 곁에만 있어도 푸근한 사람이 있고,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냥 좋은 사람이 있고, 나를 위해서 꽤나 애쓰는 사람인 듯한데, 그냥 대하기기가 편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왜 생길까요? 저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드러내는 삶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 일거라고 막연하게 말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노예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자기 노예를 위해서 예수님께 특별한 일을 청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자성사를 거행할 때 자주 사용하는 성경이기는 합니다만, 세상의 논리에 따라서 생각하자면, 그 노예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기에 주인까지 나서서 병이 낫기를 바라는 일이 생긴 것일까요? 이 기적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살면, 다른 사람의 환대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지만, 그 대답을 듣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알 수 있는 대답은 아닙니다. 자신의 청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면서도, 백인대장은 겸손의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하려고 할 때, 준비하는 말로도 사용합니다만, 성체에 대한 특별한 자세는 어디까지이어야 하겠습니까?

 

이런 백인대장의 자세와는 달리, 코린토사람들의 삶을 전하는 얘기는 조금 불편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면서, 성찬례에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이면서 자기 입과 자기 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상적인 삶의 자세에서 벗어난 사람의 태도가 우리들 안에는 얼마나 반복될까요? 이 질문은 사실상 듣기가 아주 불편합니다. 내 삶에는 코린토에 살던 사람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모습이 없다고 자신하는 것이 아주 힘들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는 먹고 마시는 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내어놓는 일이고, 내 것을 나누어 다른 사람의 삶에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기에, 실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은 어떤 일로 시작을 하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듣기는 합니다만, 그런 얘기는 2000년 가까운 세월전의 얘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그 삶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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