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강론자료

2012-0916...주일...신앙인이 드러내야 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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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09-15 ㅣ No.1307

연중 24 주일 (나해)

이사야 50,5-9야고보 2,14-18 마르코 8,27-35

2012. 9. 9. (주일). 등촌3

 

주제 :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신앙인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모습을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진 욕망입니다. 단장하고 장식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드러나는 모습을 그렇게 꾸미면서, 드러나지 않을 것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옳은 일이겠습니까?

 

세상에 좋게 보이고, 멋있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들을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내 삶에 결실을 내게 하기 위해서는 그저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행동이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모를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행동을 잘 하려면, 옳은 것(?)을 말해주는 소리를 잘 새겨듣고, 그것이 내 몸의 한 부분인 것처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드러내는 모습과 안으로 갖추어야 할 본보기를, 오늘 복음에 나온 베드로사도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베드로사도의 본보기를 통해서, 신앙인의 삶에 대한 자세 한 가지를 배울 수 있다고는 했습니다만, 그것을 배워서 내가 삶에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지식(知識)의 한 가지로 만족할 것인지에 따라서, 배운다고 하는 것의 결과도 달라질 일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먼저 물으신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있느냐?’하는 두 번째 질문을 통해서 당신과 함께 복음선포의 길에 나선 제자들의 자세를 확인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꺼내신 말씀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도를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에 일어날 일, 사람의 생각으로 말한다면 별로 반갑지 않을 일이고, 하느님의 뜻으로 한다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문제였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나서서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사도가 다음 단계에 스승님의 말씀과 그 뜻을 생각하지 않고 나섰다가 봉변을 당합니다. 입으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시라고 힘주어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사도였지만, 그는 다음 순간에 그는 사탄의 영을 가진 사악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의 삶에서 재주껏 자기 뜻을 펼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익을 얻기도 하고, 명예를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온 것이 잠시,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도 괜찮을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하는 말과 대답에는 그의 존재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본보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은 따르지 않고, 입과 귀만 만족시키는 말은 영양가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과 그 믿음을 드러내는 방법에 대한 것은, 야고보사도의 말씀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이고, 삶에서 실천해야할 자세입니다. ‘평안히 가서 몸을 따듯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라(!)’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안타까움을 눈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사도는 그렇게 말로 하는 것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런 소리를 하면서 그의 행동은 어찌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대해서 갖는 자세인 믿음에,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질문입니다. 질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그 질문에 연결되는 대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질문은 행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긴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도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일까요?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는 행동으로 그 믿음을 드러내느냐, 지식으로 보관하고 마느냐의 차이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의 올바른 모습은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될 것입니다. 이런 요소가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믿음이 지식의 한 가지로 멋있게 포장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에 좋은 영향을 남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며,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드러낼 신앙인으로서, 삶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많이 배우고, 익히는 것을 탓할 생각도 없고, 세상 삶에서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질투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만, 세상에서 발견하는 요소들은 신앙인의 삶을 판단할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예언자처럼 오늘 독서말씀에서 자기 삶을 표현한 것처럼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대고,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모욕과 수모를 피하여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돌리지도 않는 삶이 얼마나 가능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이 쉽지는 않아도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사야예언자처럼 사는 일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내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나를 하느님께 고발하고, 나를 단죄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하는 자세를 우리는 어느 때에나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잠시 신앙인으로서, 성실할 수 있도록 기도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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