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현대사회와 고독: 사람 사이에 있는 섬, 그곳을 왕래하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043

[경향 돋보기 - 현대사회와 고독] 사람 사이에 있는 섬, 그곳을 왕래하자


요즈음 들어 외로움에 지쳐서 병이 나거나 또는 죽음을 선택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로움의 원인이 단순히 이웃사람들의 무관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성격적 문제도 있기에, 외롭지 않게 살려면,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오게 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인류의 숙명적인 숙제, 외로움

외로움이란 감정은 사실 요즈음에 생긴 문제는 아닙니다. 어쩌면 인류가 생긴 이래로 외로움은 숙명적인 숙제처럼 가지고 살아야 했던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수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고 어느 정도는 인간의 숙명 같은 외로움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아직도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찾기는 오리무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외로움은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서 발생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길을 가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나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때로는 거의 없다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마음 안을 덮치는 것입니다. 또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이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나름의 신념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외로움의 늪 속에 스스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외로움을 마음 가득히 채우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바다에 뜬 섬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서로가 오갈 수 없는 섬. 그런데 이런 눈으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외로움은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간혹 이런 문제를 온몸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은 몸을 던지는 수련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외로움이란 숙제를 풀어보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곧 섬 아래를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섬이란 서로가 한 몸뚱어리인 곳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듯이, 자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라는 통찰을 얻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훈련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은 극히 소수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면에 떠오른 섬처럼 평생을 외롭게 살아갈 뿐이란 것이 현실입니다.


관계가 건강한 사람의 필수품, 낙천성

사람이 외로운 섬이라면 당연히 섬과 섬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관계를 형성한다.’ ‘인연을 맺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맺는 관계는 세 가지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 곧 부모 형제 친구 등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하느님의 관계, 마지막으로 나와 나 자신의 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가 원활하고 원만하고 건강할 때에 사람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고 인생살이에서도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마치 상다리 셋 중에서 하나가 부러진 밥상처럼 기우뚱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관계가 다 건강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는 서슴없이 베들레헴의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나선 동방박사들을 추천합니다. 세 사람이 오로지 별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나선 그 여정이 짧지도 않고 쉽지도 않았건만 세 사람이 갈라서거나 불화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였음은 외로움에 찌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어서 동방박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에 대하여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가진 덕목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낙천성입니다. 낙천성이란 하느님에 대한 실망감, 자신에 대한 실망감, 이웃에 대한 실망감이 적은 것을 말합니다. 이런 낙천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실수를 하여도 실패를 하여도 마음이 무너지거나 위축되지 않고,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하시나 보다.’ 하는 마음으로 다시 일어서고,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행동에도,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는 아량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오직 하늘 높이 떠있는 별 하나만을 바라보고 가면서도 불안해하거나 조바심하지 않았고 길을 가다가 잘못 들어섰을 때에도 별로 흔들림 없이 그저 당신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습니다. 참으로 낙천성이 풍부한 분들이었기에 그 길고 고달픈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가진 이 낙천성은 외로움의 늪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줍니다. 낙천적인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인생에서 결실을 얻을 수 있음을 동방박사 세 분이 자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낙천성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올림픽 수영부문에서 5관왕을 차지한 매트 비온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트 비온디는 미국에서 매우 촉망받는 수영선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요. 그런데 막상 올림픽 첫 번째 시합에서 매트 비온디는 동메달을 따는 데 그쳤습니다. 미국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출전에서도 금메달을 못 따고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미국인들은 매트 비온디가 새가슴이라는 둥, 국내용 선수라는 둥 온갖 비난을 다 퍼붓고, 그를 선수로 뽑은 코치들에게도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셀리그먼은 매트 비온디가 앞으로 큰일을 해낼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물론 미국인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참, 미국의 심리학자인 셀리그먼은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세 명이나 맞힌 일로 유명합니다.

여하튼 셀리그먼의 말대로 매트 비온디는 나머지 다섯 시합에 출전하여서 모조리 금메달을 따는 기적 같은 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때 기자들은 매트 비온디보다 셀리그먼이란 심리학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취재를 했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매트 비온디가 금메달을 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영코치에게 부탁하여 선수들이 힘들게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의 실제 기록보다 일 초 정도 더 늦은 기록을 알려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재미있는 현상을 알아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실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매트 비온디만이 흔들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셀리그먼은 매트 비온디의 낙천성을 본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수로 만들기

심하게 외로움을 타는 많은 분들의 경우, 낙천적인 면보다 비관적인 면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세상을 비관하고 사람들의 부정적인 면에 민감하다 보니 스스로 사람을 멀리하게 되고, 그 주변사람들도 그런 사람에게는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아서 결국은 외로움에 찌들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관적으로 외로움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결실도 별로 없어서 죽은 다음에도 무명씨로 남는 서러움을 당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빛을 보려면 외로움이란 외투를 벗어던지고 동방박사들처럼, 매트 비온디처럼 낙천적인 마음가짐을 갖추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늘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삶을 추구하면 됩니다. 대화란 상대방과 나 사이에 감정이 통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곧 대화란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에 수로를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대개 외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수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흘려보낼 수가 없어서 마치 고인 물처럼 마음 안에서 감정이 썩어가다 보니 외로움이란 늪이 만들어지고 그 늪 속에 자기 영혼이 빠져서 질식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외로워서 전화기를 들었을 때 어디엔가 전화할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의 밧줄을 끊어주는 기도와 대화

대화상대로 중요한 분이 또 있습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입니다. 이분들과 나누는 대화를 우리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우분들은 ‘기도’하면, 대개 기도문을 외우거나 그저 묵묵히 앉아서 성체조배를 하는 것을 생각하십니다만, 기도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처럼 하느님과 내가 온갖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라고 여기기보다 마치 정 많은 아버지라 생각할 수 있고, 그분 앞에서 응석 부리듯이 마음 안의 앙금을 다 털어놓는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통하여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베들레헴의 별처럼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빛을 볼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은총을 주려 하시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도우려고 하는데 정작 내가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다 헛수고입니다.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렇다면 자기 마음을 열리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에 주위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말에 힘을 얻기도 하지만,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상처입고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마음이 닫히고 병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병적인 소리들이 이른바 내재화되어, 내 안의 소리처럼 내 마음 안에서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적 심판관이라고 하는데, 부모를 비롯한 주위사람들이 던진 말들이 마치 내 안의 양심에서 나온 소리인 양 인식하면서 내 영혼을 단죄하고 처벌하는 병적인 습관이 생겨서 자기 영혼을 스스로 마음 안의 감옥에 가두는 일까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마음 안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넘쳐서 썩어가게 되고 그럴수록 마음은 더 굳게 닫힙니다. 상처입기보다 외롭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늪에서 서서히 질식해 죽어갑니다.

이런 병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상처입은 자기 마음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불러주시던 이름. 그 이름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름을 부르면 무엇인가 마음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오랫동안 마음 깊숙이 숨어서 외롭고 춥게 살아온 내 마음이 고개를 들고 자기를 부르는 소리 쪽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면 그다음에는 대화를 합니다. 상처입은 자기 마음을 달래주는 대화, 그 대화를 통하여 내 마음과 나 사이에 따뜻한 교감이 형성되면 내 마음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묵은 기억들을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립니다.

그때에 그 기억들을 보듬어주고 위로해 주고 미안함을 표현하면 오랫동안 마음을 묶었던 심리적 밧줄이 끊어지고 외로움이라는 마음 안의 감옥에서 서서히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와의 관계가 원활해지면 마음이 열려서 기도도 자유롭게 하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감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외로움을 바닥까지 말려버릴 수는 없습니다. 적당량의 외로움은 인생살이의 짐처럼 이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짐이 너무 크고 무거울 때는 좀 덜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이 바로 대화인 것입니다.

기도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자신과의 내적 대화, 이 세 가지 대화를 늘 하고 산다면 외로움의 늪에 빠져서 자기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 홍성남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상담심리대학원에서 영성상담심리를 전공하였으며, 교구 영성생활상담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벗어야 산다」, 「화나면 화내고 힘들면 쉬어」, 「아! 어쩌나」, 「새장 밖으로」 등이 있으며, 평화신문과 평화방송을 통해 신자들의 영성생활을 돕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홍성남 마태오]


1,10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